[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I was there without me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I was there without me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07.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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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외교관 출신으로 주요국 대사와 외교부 대변인을 지낸 분을 최근 어느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그분이 외교부 대변인이던 시절에 내가 홍보 부문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처음 인사를 했었다. 코로나19 직전에 그분이 외교부 산하 기관의 장을 맡고 있을 때, 마침 내가 나온 대학교 학과 동문회 주최 강연회가 그 기관을 빌려 거행되어, 그때 잠깐 또 인사했다. 이후 처음이니 5년 만의 만남이어서 최근 하는 일도 서로 주고받고 얘기가 길어졌다. 그분이 광고의 중요성에 공감한다면서 외교관 시절에 보았던 카피 한 줄이 엄청난 위력을 보인 사례를 얘기해줬다.

이차대전 때 일본군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곧 성노예로 끌려간 이들을 기리고, 일본군의 잔학상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행사의 표제어처럼 문 앞에 크게 걸려 있는 플래카드에 이런 문구가 씌여 있었단다.

I was there without me.

직역을 한다면 ‘나는 거기에 있었지만, 나 자신은 없었다’라는 모순되는 의미였지만, 그 문장을 보고는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문장을 보거나 듣는 순간, 최소한의 역사 상식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 위안소라 이름 붙인 참혹한 현장에 내 육신이 있었지만, 오직 몸뚱이만 있었고 정신이나 영혼은 없는 상태였다. 영어로 ‘beside oneself’를 ‘정신이 나갔다’라는 식으로 쓰곤 했다. 교과서에도 나왔던 숙어인데, 이 문장 앞에서는 장난스럽게 그 표현을 썼던 게 부끄럽고 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분이 애기한 문장은 2014년 3월 1일부터 4월 13일까지 문화체육관광부와 여성가족부가 공동으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특별전’에서 내건 제목이었다. 당시의 포스터를 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한글 제목이 헤드라인처럼 상부에 있고, 아래에 메인 카피처럼 핏빛을 연상시키는 색상에 날카롭게 찢긴 글자체로 ‘그곳에 나는 없었다’라고 씌어 있다. 있었던 사실을 증언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전시한 걸 생각하면 ‘그곳에 나는 없었다’라는 게 자연스레 반전으로 느껴질 수 있다. 원래의 영어 문장인 ‘I was there without me’는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나는 있었는데 없었다’라는 문장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체로는 너무나 뼈 아픈 진실을 말하고 있다.

바로 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의 전시회 이전에 주목할 만한 국제 행사가 있었다. 2014년 1월 30일에서 2월 1일 사이 진행된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Angoulême International Comics Festival)에 한국에서는 10편의 일본군 성노예-행사에서 영어로는 ‘comfort women’, 곧 ‘위안부’로 표기했다- 만화들을 출품하여 전시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로, 당시의 여성가족부 조윤선 장관까지 개막 행사에 참여했다. 이어 전시를 홍보하는 기자회견까지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페스티벌 조직위의 만류로 불발되었다고 한다. 그 소식에 이어 일본 정부나 군대에서 그런 노동을 강요한 경우는 없었다는 유인물을 일본대사관에서 뿌렸다는 사실이 뒤를 잇는 걸 보면, 일본 정부 자원에서의 반대 활동이 있었기에, 기자회견도 무산되었던 것 같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한국 측이 내건 영문 표제는 달랐다.

The Flower That Doesn’t wilt(결코 시들지 않는 꽃).

의미 자체의 강렬함은 있으나, ‘I was there without me’가 전하는 아픔과 잔혹한 정도는 덜한 느낌이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의 일본군 성노예 특별전이 있던 201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차대전 때 태평양전쟁에서의 폭력과 비인간성을 제대로 교육하자는 취지로 ‘Pacific Atrocities Education(태평양 잔악행위 고발교육)’이란 비영리기관이 창립되었다. 그 기관에서 2019년에 인턴을 한 친구가 소녀상 옆에 앉은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의 제목이 ‘What if it was me(그게 만약 나였다면)?’이었다. ‘내가 있었고(I was there), 그런데 나는 없었고(without me)’ 한 반전의 연속이 있었기에, 그 역사의 상처에 나를 넣어보고 생각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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