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한국에서 한 광고주의 광고 모델로 가장 오랫동안 활약한 기록은 김혜자 배우가 가지고 있다. 품목은 제일제당의 다시다로, 1975년부터 2002년 2월 계약을 더 연장하지 않는다고 발표할 때까지 무려 27년간 관계를 이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시대에 시작하여 김대중 대통령 때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해에 그만두었다. 트렌드가 휙휙 바뀌고, 여러 종류의 파파라치가 사생활의 영역이 없이 모델의 정보를 까발리는 21세기에 와서는 모델 계약이 3년만 넘어도 장수모델 소리를 듣는다.
내 눈에 띈 걸로만 보면 현재까지 집행되는 광고의 최장수 모델은 가발 브랜드 하이모의 이덕화 배우가 아닌가 싶다. 1999년에 당시 다니던 광고 회사에서 하이모를 경합에서 따냈을 때의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상황이 있다. 하이모의 안정성을 강조하며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장면을 넣은 시안에, 하이모의 한 임원이 자신도 가발을 오랫동안 사용했는데, 롤러코스터는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사내의 가발을 착용하면 좋을 거로 보이는 인사들 몇 명은 경합 준비 단계부터 적극 협조하면서 경합 이후에 성공 보수처럼 하이모 가발을 받았다. 광고 모델로 이덕화 배우가 나섰다는 게, 그의 자존심과 대머리라는 사실을 숨기려 해온 세월을 고려할 때 놀라웠다. 지금까지 25년, 사반세기를 계속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건 더욱 놀랍다.
사반세기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내가 뽑는 21세기 한 브랜드나 기업의 모델로 장수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는 김연아 선수이다. 2006년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김연아 선수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를 써가며,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로의 발돋움을 시작했다. 그해 3월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후에, 하반기에는 바로 시니어로 올라와 11월에 시니어 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 1위를 하고, 12월에 그랑프리 상위 6명이 다투는 파이널에 진출하여 그마저 석권했다. 16세 나이로 세계 피겨의 여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 12월에 KB금융그룹은 김연아와 후원 계약을 맺고, 2007년에 그 사실을 광고를 통해 알리며, KB금융그룹 모델 김연아가 탄생했다. 광고퀸 김연아의 첫걸음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김연아는 KB금융그룹의 주요 광고모델로 활약하고 있으니, 어느새 거의 20년에 이르는 장수모델의 대표가 되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월드 스타가 된 박은빈 배우가 작년에 KB금융그룹의 모델로 등장하고, 50대 이상 목표 고객집단을 겨냥하여서는 이영애 배우를 기용하면서 김연아 선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행사 고지나 연사 등으로 주로 선보이고 있다. 그런 광고 하나가 9월 25일 종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채용 BIG NEWS’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KB금융그룹에서 경기도와 함께 진행하는 취업박람회 행사를 알리는 광고였다. 행사 소식을 전하는 듯한 포즈와 입 모양으로 중앙에 자리 잡은 김연아 선수의 왼쪽 팔꿈치 있는 곳, 신문 지면의 좌측 중하단에 행사 참여 대상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젊은 남녀 네 명이 찍힌 사진이 있다. 작은 글씨라 잘 보이지는 않으나, 사진 아래에 캡션처럼 써진 글씨가 있었다.
※ 광고 내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했습니다.
이 고지를 보니,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이나 비록 흑백이기는 하지만 색상이 별로 자연스럽지 않았다. 알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텐데, 굳이 AI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 이유가 궁금했다. 작년 11월 메타에서는 인공지능을 사용했는데,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정치광고는 게재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대선을 앞두고 선제로 취한 조치로, 정치 부문에만 해당하였다. 한국에서는 인공지능 사실을 알려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 그럼 위의 신문 광고에서의 AI 활용 고지는 왜 꼭 들어가야 했을까. 대학 강의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토의를 해봤다. 대략 세 가지 추론이 나왔다.
첫째, 사실이니까 알리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 사진이 좀 이상하다고 볼 사람들도 있을 터이고, 나중에 AI로 만든 이미지라고 알게 되면 뭔가 속은 것처럼 느낄 이들도 있으니, 이실직고는 아니더라도 얘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의무 조항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메타가 미국 정치광고에 적용하려는 고지의무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했을 때는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과 추천 가이드라인이 나오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 아니더라도 어차피 알리게 될 바에는 먼저 실행하는 게 낫다고 봤을 수 있다.
마지막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학생들과 의견이 일치했는데, AI를 활용한다는 게 앞서 가는 행위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주 여기 칼럼에서 얘기했던 마치 젊은이들의 유행어를 쓰는 윗세대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오래되고, 보수적인 평판의 기업인데, 실상으로는 AI 기술까지 쓰면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이미지를 심고자 노력하는 일환이었을 수 있다. 특히 현역에서도 은퇴하고, 젊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장수모델 김연아 선수의 꾸준함 반대편의 나이 드는 현실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가미할 수 있는 반전 장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서경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