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올림픽 비너스와 토우(土偶)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흥분하면 몸이 부풀어 오르며 무지막지한 덩치로 변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 ‘괴물 헐크(Incredible Hulk)’와 같은 녹색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였다. 양손에 낀 큼지막한 산타 의상 풍의 빨간색 복싱 글러브가 녹색 배경에 더욱 부조화를 이루며 눈에 띄었다. 얼굴과 몸통 포즈는 눈에 익었다.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의 대표 조각상으로 꼽히는 ‘밀로의 비너스’였다. 그에게 녹색 페인트를 퍼붓고는 양팔까지 붙이고, 거기에 무거운 중량급 선수에게나 어울릴 크기의 복싱 글로브를 끼웠다.
한 친구가 기괴하기까지 한 조각상의 사진을 보냈는데, 포토샵 초보자의 연습 작품인가 싶기도 했고, 억지로 밈(meme)을 만들려 한 것 같기도 하고, 2년여 전부터 유행하는 가상 옥외광고(FOOH)의 일종인 듯도 했다. 한국 신문 기사로 아래와 같이 조각상에 대한 설명이 나왔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 국회 건물 앞에 ‘2024 파리올림픽·패럴림픽’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 설치됐다. 예술가 로랑 페브로스가 디자인한 조형물은 비너스 조각상이 각각 창던지기, 양궁, 서핑, 복싱, 농구, 테니스를 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는 올림픽 종목을 형상화한 것이다. 조형물은 대회 기간 전시될 예정이다.
검색하니 그리스 건축 양식의 프랑스 국회 건물 기둥 앞에 기사에서 말한 여섯 개의 비너스 조각상들 사진이 나왔다. 그런데 이 조각상들을 언급한 해외 언론 기사를 찾기가 힘들었다. 설치 행사 사진이 몇 장 나왔는데, 로랑 페브로(Laurent Febros)라는 작가와 한 여성만 조촐하게 찍혀 있어서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혹시나 프랑스 국회 소식에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 프랑스 국회 홈페이지에 갔더니, 다행스럽게(?) 올림픽을 기념하여 조각상을 설치했다며 색상을 입힌 까닭까지 설명해 놓았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원래 채색이 되어서 그 전통을 이으며, 현대성을 가미하기 위해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의 다섯 색상을 입혔다고 한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고대 조각상에 현대 의상을 입힌 경우가 있었다. 영국의 광고 회사인 RKCR/Y&R 런던은 2013년 9월에 청바지, 나이키 운동복 상의, 체크무늬 드레스 셔츠 등을 입은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클래식 빈티지 의류(Classic Vintage Clothing)’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중고 의류를 유통하는 트레이드(Traid)를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고대와 현대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찬사를 받으며, 중고 의류 기부와 후원 모금에도 영국 국경을 넘어 톡톡한 효과를 발휘했다.
사진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고대 조각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변형해 내놓는다며, 신고전 조각가(neo-antique sculptor)를 자처하는 레오 까야르(Léo Caillard)의 작품인데, 단순히 조각상 사진에 포토샵으로 옷을 입히는 식이 아니었다. 까야르는 조각상과 비슷한 체형의 사람들을 뽑아서, 실제 옷을 입힌 후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주름까지 잡힌 상태의 옷 사진을 조각상에 입히는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정말 조각상들이 팔과 몸통을 움직여 옷을 입은 듯한 자연스러움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로랑 페브로는 직접 조각했으니, 포토샵보다는 훨씬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게다가 기묘한 색상들이나 어색한 스포츠 자세들을 보면, 주문자들의 간섭이 꽤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빨간색 복싱 글러브를 낀 녹색 피부 비너스의 사진을 내게 보낸 친구는, 배경을 까만색으로 지우고 탑 자체에 집중하는 사진 시리즈로 유명한 양현모 작가였다. 그가 2018년 특별한 전시회를 열었다. 경북 경주의 월성에서 발굴된 6세기 신라 시대의 토우(土偶)에 21세기의 레고 조각들을 결합했다. 그해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분위기와도 맞춰서 제작한 스키 타는 토우와 아이스하키 선수 토우가 인기를 끌었다. 그의 토우 시리즈와 이번 파리 올림픽 비너스의 차이를 말해주었다.
‘하키 하는 토우는 신나고, 복싱 하는 비너스는 무섭네.’
토우는 유머를 깔고 있지만, 비너스에는 승부를 가리는 결기만 느껴진다고도 했다. 양현모 작가는 토우와 레고의 ‘차이와 같음’을 ‘꿈과 상상력’으로 빚어내었다. 까야르는 진짜 사람과 조각상 인물의 일체화를 이루어 냈다. 페브로의 비너스에는 스포츠 행사가 먼저였다. 광고주라고 볼 수 있는 주문자가 파리올림픽 조직위원회나 프랑스 국회였겠지만, 밀로의 비너스가, 곧 예술이 앞자리에 와야 했다. 그게 스포츠도, 올림픽도 함께 사는 길이었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