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덴츠와 한국 광고 (하)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은 조선을 떠났다. 그런데 이듬해 2월 17일 자 조선일보에는 <조선전보통신사(朝鮮電報通信社)> 광고가 실렸다. 신문이 타블로이드판 크기이던 무렵이었기에 큰 광고였다. 내용을 보면 전국의 신문, 잡지와 특약을 맺어 광고 게재를 대리하며 광고에 관한 무료 상담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주소는 서울의 일본인 번화가이던 본정(충무로) 2가, 전화번호가 나와 있다.
4년 후 1950년 동아일보 창간 30주년 기념호에는 <한국통신사(韓國通信社)>의 제법 큰 광고가 있다. 역시 전국의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려면 이 통신사 광고대리부(廣告代理部)>에 연락하라는 내용이다. 회사 위치는 종로이며 전화번호가 나와 있다.
4년 간격이 있는 이 두 광고의 공통점은 광고주가 통신사이며 신문광고 대리업을 한다는 것이다. 신문광고 대리업이 얼마나 성했는지는 모르나 통신사 사업의 일부로 신문광고 대리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전보통신사(덴츠)>가 하던 사업을 본딴 것이다. <조선전보통신사>의 경우는 <일본>을 <조선>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1965년 6월 22일이었다. 1967년 한국 광고계 최대 뉴스는 합동통신사와 일본 최대의 광고회사 덴츠의 업무 제휴였다. 덴츠로서는 독립한 한국 광고시장 진출이라는 비즈니스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합동통신은 통신이라는 적자 경영 탈피의 최선책이 광고대리업이었고, 그 시사를 일본 덴츠에서 찾은 것이다. 합동통신과 덴츠에는 이런 경제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덴츠라는 이름은 전보통신사라는 이름을 줄인 것으로서 초기의 이름은 일본전보통신사였다.
동맹통신(同盟通信) 탄생 1936년에 정부 방침에 따라 덴츠의 통신업무는 연합통신(聯合通信)에 이양하고 연합의 광고 사업은 덴츠에 이양했다. 일본에서는 전련(電聯)합병이라고 알려진 대사건이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일본의 대형 국책 통신사 <동맹통신>이었다. 이런 배경을 보면 덴츠와 동맹통신은 남남이 아니다. 동맹통신은 1936년 이래 서울의 중심가 소공동에 자리했고, 해방 이후 1966년에는 합동통신이 인수했다. 덴츠와 합동통신도 남남이 아니다. 덴츠는 한국 최초의 광고대리점으로 1906년에 경성지국으로 개업했다. 그러니 60년 만에 옛집에 되돌아오는 셈이었다. 간단히 살핀 합동통신과 덴츠 두 회사의 관계이다. 처음에는 합동통신사 광고기획실이었으나 곧 <합동광고>로 이름을 바꾸고 광고대리점이 되었다.
합동광고 탄생 이렇게 해서 매체인 통신사가 광고 대행업에 참가하는 첫 사례가 되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합동광고보다 앞서 광고대리업을 한 회사가 있었으나 사실상 견실한 기업의 광고대리업은 합동광고가 처음이었다. 뒤에 외무장관이 된 외교관 출신인 합동통신 사장이 된 이원경(李源京)은 박두병 회장과 의논 끝에 일본 광고대리점 1위인 덴츠의 상무이사와 2위인 하쿠호도가 합작한 맥캔에릭슨-하쿠호도 전무를 각각 2주간씩 초청해서 회담을 가진 끝에 덴츠와 업무제휴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1967년 1월 1일부로 덴츠와 업무제휴를 맺었다.
합동통신은 두 가지 큰 일에 착수했다. 첫째가 광고대리점을 하려면 우선 한국의 광고시장 규모를 알아야 했다. 광고기획실에 조사부를 신설, 그해 10월 25일에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인 67년 5, 6, 7월 서울을 중심한 광고량 조사를 발표했다. 발표한 자료 표지와 신문별 업종별 광고량은 그림에 보는 바와 같다. 서울에 국한한 것은 당시 한국 광고시장을 지배한 것은 8개 전국지 그 가운데서도 4대지라고 부르던 동아, 조선, 중앙, 한국일보가 지배하고 있었다. 신문, 전파광고 할 것 없이 전국지와 중앙의 방송국이 주도했다. TV는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73,200 대 보급으로 가구 대비 1% 이하였다. 라디오는 240만 대였다. 물론 덴츠의 도움이 있었지만, 수작업에 의한 광고량 조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자료 덕분에 국제광고협회 (International Advertising Association, IAA)가 실시하는 세계 유일한 세계 광고비 조사(1968년)에 한국 자료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한국 광고비 조사는 그 뒤 중단되었다가 제일기획이 79년부터 광고연감을 발행하면서 재개되었다.
또 다른 일은 광고 전문 월간지의 발행이었다. 창간 다음 달인 1967년 6월호의 목차를 보면 <합동광고>를 통해 한국 광고산업의 놀라운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가장 큰 일은 일본 덴츠를 통해 미국, 나아가서는 ,유럽 광고 시장을 알게 되었다. 한문이 수두룩한 목차이지만, 주로 미국 광고계 소식이 나와 있다.
주목을 끄는 작은 박스 기사는 연재 <세계의 광고대리점> J. Walter Thompson 소개를 제1호로 시작한 일이다. 사원 수 7,500명, 미국에 17개, 해외 39개 합계 56개 사무소에서 12억 2,800만 달러의 취급액 가운데 해외가 52%를 차지하는 숫자의 의미는 ‘경이’였을 것이다. 놀라운 금액과 창설 105년(1967년 기준)의 광고대리점이란 기업의 역사와 규모와 스케일은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Advertising Age라는 미국 (그리고 세계적) 광고 전문 주간지가 소개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 접하는 각종 세계 광고계 뉴스의 집합이 이 합동광고였다. 비록 경영상의 문제로 1개년에 폐간했지만 70년대 초반에 광고대리점이 아니라 광고대행사 시대가 개막하면서 유력 광고대행사가 다투어가며 월간 타브로이드 판 회보를 내는 선각자의 구실을 했다.
덴츠 맨의 도움은 1981년 갑작스러운 TV의 컬러화에 따른 혼란기에도 필요했다. 우리는 컬러 광고 제작과 관련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덴츠의 영향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제일기획의 초기 광고연감을 보면, 일본 덴츠 광고연감의 자료들이 인용되고 있다. 덴츠의 협력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외국의 영상 광고 상영회가 개최되었다. 2008년 부산국제광고제가 시작할 무렵에는 우에죠 노리오(植條則夫) 교수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다. 그는 『벌거숭이 덴츠 (裸の電通)』란 유명한 책을 쓴 덴츠 오사카의 광고 카피 베터랑이며 일본 공익광고에 대부와 같은 박사이며 교수였다. 은퇴 후 부산국제광고제 초기에서 10여 년 동안 일본 심사위원 선정을 비롯해 광고제 소개와 출품 판촉에 이르기까지 눈에 안 보이는 도움을 주었다. 80대 연세의 은퇴한 덴츠 맨이 일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판촉을 도와 일본 광고시장에서 큰 힘이 됐다.
덴츠는 2013년 세계 광고계를 놀라게 한 일을 했다. 영국의 광고회사 그룹 이지스(Aegis)를 49억 달러 현금 지불로 매입했다. 세계 광고계의 톱 뉴스가 되었다.
역대 덴츠 사장의 고민은 20%를 넘지 못하는 덴츠의 국제 부문 점유율이었다. 유일한 탈출은 서구 광고회사를 사들이거나 합작하는 길이었다. 이지스 매입은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지스 매입 10년 뒤의 결과가 덴츠 IR 자료에 나타나 있다. 덴츠의 2023년 수입 비율인데 일본 40%, 남북미 29%, 유럽 중동 및 아프리카 21%, 아시아 태평양 지역 10%이다. 영국의 이지스를 매입한 결과이다.
스태티스타의 이 자료를 보고 요시다 히데오가 일본 패전 이듬해 1946년 2월 <회사의 당면 과제> 6 가지를 제창한(지난 호, ’중’ 참조) 일이 생각났다. 2001년 7월 1일 창립 100주년에 출판한 『電通100年 1901-2001 Dentsu 100th Anniversaty』라는 책이 있다. 그 자료 편 14 페이지에는 다음 그림이 있는데, 요시다가 1951년에 선포한 유명한 오니 짓소쿠(귀신 10칙. 鬼十則), 영문 번역은 Dentsu's 10 Working Guidelines이다. 이 그림 설명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951년 (소화 26) 제정. 86년 7월의 기업 이념 체계 제정 시에 다시 덴츠인의 행동 규범으로 포함하였다.
귀(鬼)란 귀신이나 도깨비인데 덴츠 사원을 뜻하며 귀신처럼 일한다는 뜻이다. 흥미 있는 것은 창립 100주년 기념 책에 50년 전의 사장 요시다가 제창한 열 가지 지킬 사항을 쓴 그의 육필과 영문 번역 전문을 되풀이하는가이다. 틀림 없이 요시다라는 육체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2013년 덴츠가 거액 49억 달러를 투자해 일시금으로 영국 이지스를 매입한 뒤에는 요시다의 기업 정신이 깔려 있다고 보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필자가 들은 여담 같은 사실이 있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말소하였기 때문에 당했던 1936년 9월의 무기 정간이 1937년 6월 1일에 풀린 뒤, 일본 광고시장 복구를 위해 김승문(金勝文)이 동아일보 동경 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승문은 평양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3.1 독립운동에 가담한 죄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 뒤 일본 리쓰메이칸(立命館大學) 대학을 졸업하고 1928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한 사람이다. 동경에서 2년 간 일본광고 복구를 하는 동안 덴츠 지방 과장 요시다를 자주 만났다. 김승문의 요시다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동경대학 출신으로 사람이 의리에 강하고, 인정도 있고, 또 두뇌가 명석하고, 판단이 빠르고, 그래서 지방과장으로서 명지방과장인데, 그냥 일을 지레 끌고 나오는 법이 없어요. 즉결로 처리해 나가는데...
시사를 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요시다가 사장이 되기 한 해 전 1946년에는 옛날을 잊지 않고 그는 금시계 두 개를 김승문에게 보냈다 한다. 그의 사람됨과 국제 감각을 반영하는 일이었다.
2001년 덴츠 100주년 때 나리타 유타카(成田 豊) 덴츠 사장은 한국 출생으로 서울중고교 전신인 일제시대 경성중학 출신이었다.
덴츠는 1996년에 보광그룹과 합작 광고대행사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2013년 영국 이지스를 매입한 후에는 일본 국내와 국제 광고를 덴츠와 이지스로 나눈 이름으로 대행하다가 다시 덴츠 이름으로 통합했다. 2013년 이지스 매입에서 2023년에 이르는 10년 사이의 변화는 의 스태티스타의 덴츠 지역별 수입에 나타나 있다.
한국은 90년대 초 광고시장을 완전히 개방했다. 1996년 국제광고협회(IAA) 세계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서는 덴츠와는 서로 주고받는 처지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주요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해서 다과회를 베풀었다. 놀라운 한국 광고산업의 전환이었다.
덴츠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인가? 잘못한 것 뒤진 것이 무엇인가를 뉘우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재빨리 파악하고 서슴없이 바꾸는 겸손과 결단이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 변화의 현장 미국을 본떠 배우고 연구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