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드타임스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모든 길은 지도를 벗어난 순간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길’을 배운다. 책상 위엔 항상 목적지가 있고, 종이 위 선들은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좌표가 있고, 방향이 있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 배운다. 하지만 살아보면 안다. 세상에는 시작과 끝을 직선으로 잇지 못하는 길이 더 많다는 걸.
지름길이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속도와 효율이라는 유혹이 숨어 있다. 더 빨리, 더 적게, 더 단순하게. 하지만 그런 길은 반드시 값을 치르게 되어 있다. 길을 아낀 만큼, 시간이 묶인다. 생각을 줄인 만큼, 마음이 굳는다. 서두른 만큼, 발이 묶인다.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좋은 디자인은 지름길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먼 길, 가장 어지러운 길, 가장 불확실한 길에서 시작된다. 헤매는 과정에서 본질이 드러나고, 시행착오의 무게만큼 밀도가 생긴다. 다듬고 다시 그리는 손끝에서야 비로소 ‘길 아닌 길’이 선으로 바뀐다.
돌아가는 길엔 패턴이 없다. 그래서 힘들다. 누구도 먼저 지나가지 않았기에, 앞선 실패조차 없다. 눈에 보이는 길이 없으니 비교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속도’를 찾는다. 누구보다 빠르지 않더라도, 누구와도 닮지 않은 길을 걷는 속도. 그 속도만이 결국, 가장 먼 곳까지 데려다주는 유일한 추진력이다.
내가 택한 길은 언제나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필요해 보이는 우회와, 의미 없는 곁눈질로 가득한 길. 하지만 돌아간 그 길 위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풍경을 기억하고, 의미 없는 돌부리 하나에 멈춰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디자인은 그런 길 위에서 자라났다. 기획도, 문장도, 상상도, 모두 ‘헤맨 길’에서 탄생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정답이 없는 지도 위에서, 누구의 방향도 아닌, 자신의 감각으로만 걸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헤맨다는 건 실패가 아니다. 헤맨다는 건 지금 여기가 ‘내가 설계한 길’이라는 증거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누구도 대신 걸어주지 않은 길. 그 길의 끝엔 도착지가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착보다 더 소중한 것은, 길을 만든 나 자신이다. 헤맨 길이, 나의 길이다. 돌아가더라도, 늦더라도, 틀리더라도. 그 길이 내 디자인이다.
하인즈 베커 Heinz Becker
30년 가까이 전 세계 광고회사를 떠돌며 Copy Writer, Creative Director, ECD, CCO로 살았다. 지휘한 캠페인 수백개, 성공한 캠페인 수십개, 쓴 책 3권, 영화가 된 책이 하나 있다. 2024년 자발적 은퇴 후, 브런치와 Medium에 한글과 영어로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가끔은 강의와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