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역사에 남을 기자회견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역사에 남을 기자회견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04.2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BS뉴스 캡처
SBS뉴스 캡처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점심을 먹다가 부리나케 달려갔다고 했다. 30분 전에 통보받았다는데, 소집한 이도 갑작스럽게 나온 듯한 차림새였다. 앞창이 심하게 굽은 LA다저스 야구모자를 쓰고, 집에서 편하게 입는 헐렁한 줄무늬 티셔츠는 기자회견이라는 행사와는 영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와 풍경 속에 아이돌 걸그룹 뉴진스의 대모(代母)라고 불리는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4월 26일 기자회견이 열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주인공이 무대 위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서거나 앉고, 인사말을 건네며 보통의 기자회견은 시작되나, 그와는 전혀 다른 식의 전개가 되었다. 마이크를 건네받고 연신 터지는 플래시에 눈을 찡그리고 손을 모자챙에 대고 플래시 빛을 가리려 하더니, 연예인이 아니므로 플래시가 터지면 말할 수 없다며, 사진과 영상 기자들을 물리쳤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주인공으로 나서서 말만 잘하더니’라는 비아냥 댓글이 나왔다.

이어진 발언도 상궤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간 상황에 대한 격정적인 토로와 반박이 이어졌다. 자신을 마녀로 모는 데 기자들도 공범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보통의 기자회견에서는 듣기 힘든 원색적인 표현들이 나왔다. 역시나 시시각각으로 나오는 언론의 헤드라인은 내용보다는 ‘미친XX’, ‘X랄’ 식의 단어 퍼즐 형식이 차지했다. 그런 표현에 당황해한다는 캡션과 함께 양옆의 변호사들 사진이 필수 장식처럼 나왔다.

기자회견이 열린다는 통보를 받고는 점심을 먹다가 달려갔다는 기자는 자신이 연예 관련 1천 번 이상의 기자회견에 참석했는데, 한국 연예계의 역사에 남을 두 번째 기자회견이라고 했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이들이 언급했다. 일본 야쿠자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 연예인을 얽어 넣은 이야기를 마구 기사로 내보내고, 당연하게 소문이 확산하자 그에 대응하여 가수 나훈아가 소집한 2008년의 기자회견이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과 기사에 대한 반박을 넘어서 기자들을 혼내다시피 하던 나훈아가 단상의 테이블 위로 올라가며 바지 지퍼를 내리는 제스처로 분위기를 압도해 버렸던 회견이었다. 연예기자들 사이에서는 그 나훈아 회견 현장에 있었느냐 여부를 가지고 나름 연조를 따지는 것 같은데, 기자의 표현으로는 이번 민희진 회견이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 분기점으로 작용할 것 같다고 했다.

SBS뉴스 캡처
SBS뉴스 캡처

기자들끼리 따지는 것을 떠나 이번 기자회견이 대중에게 전파되는 방식과 과정에서 2008년의 나훈아 회견과 다른 점들이 있다. 첫째, 이번 회견은 처음 민희진 대표가 회견장에 들어서는 모습부터 끝나고 기자들과 개인적으로 인사하며 명함을 받는 장면까지 모든 순간이 공개, 중계되었다. 추려지고 편집된 모습만 보인 이전 회견들과 가장 다른 점이었다. 중계되는 화면과 함께 댓글들이 리얼타임으로 대중들의 반응을 전하며, 말 한마디, 제스처 하나에 바뀌는 여론 향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셋째로 어도어의 모회사라고 할 수 있는 하이브의 일련의 움직임부터 민희진 대표의 그간 행동거지와 기자회견에서의 언행까지 샅샅이 분석한 동영상 콘텐츠들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초기 레거시 미디어에 의하여 형성된 민 대표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상당 부분 희석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50대 후반의 상당히 보수적인 경향의 한 여성이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을 두고 “제대로 ‘힙합 정신’을 보여주었다”라는 평가를 했다.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에, 헐렁한 평상복 그대로 입고 나와,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일상의 용어로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한 게 바로 힙합이라는 거다. 모자부터 상의와 바지까지 모두 패션 앱에 경쟁하듯이 떠서 팔려 나가는 양태가 벌어지는 것도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힙합 스타들의 행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쨌든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기존의 기자회견이라는 틀을 깬 반전임은 틀림없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