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야시카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정말 만났는가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야시카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정말 만났는가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05.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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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한글에 러시아 키릴 문자, 영어가 어우러진 표지가 심상치 않다. 차르 시대 러시아 군인들의 단체 사진은 오래된 흑백사진들이 그러하듯 애잔함에 더해 코믹한 느낌도 드는데, 오른쪽 아래 약간 퉁명스러런 표정의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단 여성은 위압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빛바랜 가운데도 형형한 눈빛은,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려도,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다.

군복 차림의 그 여성은 표지 왼쪽 위에 나온 대로 ‘러시아 여성결사대대’라는 부대의 사령관을 지낸 ‘마리야 보치카료바’이다. 윗부분 중간에 쓰인 것처럼 그는 ‘농민, 유형자, 군인’의 삶을 보냈다.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돌아와 술만 퍼마시는 아버지와 당연히 온갖 고생을 하는 어머니에게서 셋째 딸로 태어나 처절한 가난뱅이 농민으로 십 대 중반까지 산다. 아버지의 폭행과 술주정과 가난의 탈출구로 결혼을 하나, 아버지와 거의 같은 부류의 주정뱅이가 남편이었다. 그 남편에게서 도망쳐 유곽 비슷한 곳으로 유인되었다가 만난 학생 출신과 결혼한다. 새 남편은 신혼 시절에 혁명가 친구를 도운 죄로 유형을 가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남편의 유형지까지 찾아가는 보치카료바. 책의 첫 부분에서 빠져든 건 바로 너무나 생생하여 가슴을 후벼 파는 차르 치하 러시아 벽촌 농민들과 유형자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처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가 아무리 대문호라고 해도, 기본 귀족이고, 지식인이란 말이야. 그 농투산이 민중의 삶을 묘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실감해.”

그런 거친 삶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가 찾은 돌파구가 일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군대였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이고, 가뜩이나 남녀차별이 심했던 보수적인 제정 러시아의 군대에서 여성의 입대를 허용하는 데는 차르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그런 허가를 받을 정도로 보치카료바는 머리가 영민하고, 배짱과 함께 행동력도 있었다. 온갖 고생을 겪으며 단련된 심신에, 동료 전우를 구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정과 의리에, 행운이 함께 하면서 인정받는 노련한 전사로 인정받고, 군대 내 유명 인사로까지 떠오른다. 동료 군인들은 그를 야콥의 애칭인 야시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군대 내 다수의 남성은 성희롱에는 누구보다 앞장서다가 전투에서는 뒷걸음질하는 겁쟁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서 차르 체제가 붕괴하고, 각 군에 소비에트가 구성되며 부대 단위로 병사위원회가 조직된다. 싸우던 독일과의 강화 조짐이 보이며, 병사들은 전투를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야시카는 혁혁한 전공으로 쌓인 명성을 기반으로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조직하여, 남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자극받은 남자들이 전투에 앞장서 나가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부대가 바로 ‘여성결사대대’였다. 

여성결사대대 (출처 위키피디아)
여성결사대대 (출처 위키피디아)

독일과 러시아는 이미 강화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고, 병사위원회의 존재는 무조건 상명하복의 전통 군율에 익숙한 야시카에는 불편했다. 최전방으로 나갔던 야시카 보치캬로바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이후 여성결사대대를 해체하고, 구(舊)체제의 장교로 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볼셰비키 본부로 압송되어 심문받는다.

그 과정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두 최고 주역인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다고 한다. 반(反) 혁명 여성부대의 창설자와 혁명의 전설적 지도자 2인과의 만남이라니! 책에는 두 쪽에 걸쳐서 세 명이 만나서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농민 여성으로 야시카를 자기편으로 회유하나, 당당히 독일과의 전쟁 지속을 외쳤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좀 이상했다. 과문하긴 하지만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한 기록 중에서 이런 사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고, 상식적으로도 봐도 정황이나 말투가 이상했다. 역시나 책 맨 뒤의 옮긴 이 해제를 보면 레닌과 트로츠키와 야시카의 만남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한다.

보치카료바는 1918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볼셰비키 추적대를 따돌리고 미국으로 가는 데 성공한다. 미국에서 아이작 돈 레빈이란 반(反) 볼셰비키 성향이 강한 작가를 만나서 그의 생을 구술하고, 그게 바로 이 책의 영문판 원본이 되어 다음 해인 1919년에 출간된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온 야시카는 시베리아에서 볼셰비키에 대항해 싸우다가 1920년에 체포되어, 그해 5월에 총살된다.

러시아에서는 보치카료바가 총살되지 않고 탈출하거나 빼돌려졌다는 얘기가 도시전설처럼 돌았다고 한다. 만약 보치카료바가 살아서 몇십 년 후에 레닌도 트로츠키도 모두 사망한 후에 등장하여, 두 사람을 만난 게 사실이었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비밀리에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기로 했고 배석자도 두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면, 증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기가 힘들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자서전에 보면 이런 사례들이 꽤 있다. 어떤 이는 오래 살아서 몇 차례에 걸쳐 자서전을 냈는데, 60대 초와 80대 후반 자서전의 기술이 다르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 선배가 "오래 사는 게 승자다. 증명해줄 이가 다 죽었으니, 자기 맘대로 '그때 이랬다'고 하고 다닌다"고 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면서 인정해야 하나. 이 정도는 귀여운 역사의 농담 같은 반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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