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최영호 기자] 위기는 이제 기업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위기는 기업의 사건·사고, 소비자 불만, 인수합병, 노사이슈 등은 물론, 개인도 CEO 뿐 아니라 정치인, 연예인, 체육인 누구나 겪는 일이다. 기회, 단체는 물론이고, 이제 개인한테도 위기관리는 필수이다. 그런데 위기관리에 관해 물어보면, 원론적인 이야기만 듣게 되는 경우가 많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두루뭉실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 기자생활을 하다 KPR에서 20년 이상 수많은 기업과 CEO 등의 위기관리, 미디어트레이닝, 전략컨설팅을 맡아온 진짜 위기관리 전문가인 KPR의 이영훈 ESG전략실장이 <여론 전쟁, 출구는 있다>를 출간했다. 이영훈 실장으로부터 위기와 위기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소개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KPR에서 ESG전략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영훈입니다. KPR에서 20여년간 수많은 국내외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위기, 이슈 상황에서의 위기 커뮤니케이션 방향을 조언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갈등이나 비난받는 상황을 벗어나는 실질적 해결방안 개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KPR에 합류하기 전에는 한국경제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며 기업의 흥망성쇠를 취재했습니다. 제가 공인노무사나 사회조사분석사 자격을 딴 것도 위기 커뮤니케이션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은 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출간하신 <여론전쟁, 출구는 있다>는 어떤 책인가요?
제목이 조금 거창하지만,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기업의 위기를 주로 다뤘지만, 정부 부처나 NGO 등 다른 형태의 조직이나 심지어 개인의 위기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주체가 누구이든 ‘위기’는 항상 일어날 수 있고 그럴 때면 '위기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전략적 행동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공통된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위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위기란 무엇인가요?
개별 위기마다 원인과 현상은 다를 수 있지만 공통으로 '무언가 잘못했다고 비난을 받으며 굉장히 압박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으로 생각합니다. 이때 단순한 심리적 압박 차원을 넘어, 기업은 다른 이해관계자나 공중들에게 피해를 준 위기사건의 원인 제공자로서 ‘잘못을 고쳐서 문제 상황을 해결하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해결은 실질적으로 문제가 된 상황의 개선(사건 관리)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정보수요 해소 즉, 해명(커뮤니케이션 관리)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위기 관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 이야기해주신다면?
위기 사건의 본질 즉, '문제가 무엇이냐'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잘못 이해하면 해법도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위기관리에서도 왜 사람들이 화가 났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비난을 받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틀린 답을 내놓게 되고, 그러한 답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책에서 위기 삼각형이란 개념을 제안하고 위기상황에서 기업은 3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다 보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제대로 된 답을 찾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포지션 방정식은 위기 삼각형이 던지는 3가지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 것인지를 도와주는 모델입니다. 베노이트 등 여러 학자가 제시했던 이미지 회복 전략과 비슷한 영역이죠. 다만, 저는 이미지 회복 전략의 선택은 위기의 유형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위기사건에 대한 여러 이해관계자의 인식, 문제를 일으킨 기업의 책임 정도, 원인제공자로서 문제 해결에 대한 대안 등 3가지 차원의 평가가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비슷한 원인이나 유형의 위기사건인데도 비난의 정도가 다르거나, 대응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업마다 3가지 차원의 진단과 해법이 달라서 생기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위기 사건은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는 '사회적 사건'이기에 문제 해결도 기업의 일방적 선택이 아니라 기업과 내외부 이해관계자의 평가가 조화된 합의된 선택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포지션 방정식이 내놓는 3가지 답에 가능한 '공감', '책임', '관계'라는 3가지 키워드가 들어가야 맞는 답이 된다고 봅니다.
위기관리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잘 안되는 것 같은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할 때 다른 변수가 끼어든다면, 커뮤니케이션이 틀리거나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집단사고나 책임회피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지겠다고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책임을 지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도 다시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위기는 기회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기업에게 위기는 기회가 아닙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려면 기업이 사건을 계기로 위기에 튼튼한 체질로 변화해야 하는데, 이러한 변화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기에 많은 기업이 변화 관리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냥 변화의 흉내만 내는 경우가 많은 거죠. 이러한 기업에게 위기는 그냥 위기입니다. 당면한 위기를 어쩌다 한번 잘 넘어갈 수는 있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상처가 아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위기 요인일 뿐입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위기관리에 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나라 기업이 특히 위기관리에 약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국적 기업이 좀 더 원칙에 집중하고, 호흡이 길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각국의 Governance 문화 차이나 본사와 지사 사이에 있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에서 발생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위기관리의 차이는 국적보다는 개별 기업의 편차에서 발생한다고 생각됩니다. 위기관리 역량은 구성원, 시스템, 조직문화의 3가지 차원으로 구성됩니다. 위기를 예방과 완화, 성공적 대응, 이후의 회복까지 세가지 차원의 역량들이 잘 조화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편차들이 발생합니다. 특히, 국민이 관심을 둘 정도의 위기는 전사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한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사건을 인식하거나 해결하려는 경영자의 철학이나 기업의 문화가 큰 차이점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너 리스크가 꽤 큰 편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없어서 거의 포기하는 편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그래도 방법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ESG에서 G(governance)는 기업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으로 투명하고 이뤄짐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업시민으로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도적인 보완책을 만드는 것이 장기적인 대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위기 사건의 발생 자체를 억제하고, 대응 시 임팩트를 완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신뢰자산을 축적하는 등 위기 대응 역량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도화된 접근과는 별개로 위기관리를 할 때 외부 전문가 등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도 매우 현실적인 대책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너를 포함한 기업 구성원들의 마인드가 기업 중심, 사회 중심으로 좀 더 열려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위기관리에서 모범 사례가 있을까요?
여러 모범 사례가 많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에서 '울산서비스'라는 가칭으로 소개한 회사의 사례가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구성원이 회사와의 협상 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여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건이었지만, 위기TF가 침착하고 정확하게 대응했고, 무엇보다 사망자와 유족에 대한 진정성 있는 자세가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됐습니다. 위기관리, 위기 커뮤니케이션에서 위기 사건을 대하는 기업의 태도가 가장 핵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사례였습니다.
AI가 기업에 적극 활용되면서 새로운 위기 유형이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예상되는 위기 유형이 있을까요?
AI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대비해야 합니다. AI의 대표적 위기요소인 '가짜 뉴스'의 경우 사회 전체의 안정성 문제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개별 기업이 이를 부당하게 이용하거나, 거꾸로 피해를 보는 구체적인 사례들은 이제 시작 단계 정도로 생각됩니다.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 AI 보다 더욱 중요한 위기 요인은 ESG 리스크라고 생각됩니다. 공시나 제도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위기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도 현실화된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그린 워싱(green washing)'이라는 단어를 알 정도로 E 영역의 문제는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그린 워싱의 핵심은 '허위과장광고'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으로 마케팅 전반에서 허위과장이나 비방광고의 위험성은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폭발력이 커지고 있는 이슈는 S의 영역입니다. 이미 페미니스트 논란 등으로 우리 사회, 우리 기업이 여러 번의 홍역을 치렀지만, 앞으로도 다양성, 인권 등 사회적 가치의 영역에서 많은 이슈가 제기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업들이 브랜드 액티비즘(Brand Activism)을 내세우거나 대의명분 마케팅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위험요소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핵심 위기영역으로 진입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위기관리 또는 위기 커뮤니케이션을 너무 기술적인 측면,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업의 비전이나 철학, 건강함, 기업시민으로서 태도 등 본질적인 문제에 더욱 집중하면 좋겠어요. 동시에 자사에 맞는 위기 대응 역량을 높여 나가는 데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위기의 예방과 완화는 물론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것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조건 위기 대응 역량에만 투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투자에는 효과성과 효율성 둘 다 중요합니다. 자사의 상황에 가장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인 역량 강화는 무엇일지 고민하고 또 실행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