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목 부분이 야간 헐거워진 분위기의 빨간색 터틀넥에 옅은 갈색의 뿔테 안경을 쓴 이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들며 정면을 바라본다. 백발 기가 있지만, 원래의 금발 기가 남아 있는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예술가 같은 인상도 풍긴다. 마이크나 악기를 쥐는 듯한 모양으로 3분의 2 쯤 물이 찬 유리컵을 들어 보이며 독백을 시작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시나요? 우리가 마실 물이 없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이 귀한 물을 마시는 거예요.”
안타까움이 지나쳐서 화가 난 듯도 하다. 이런 말을 하며 똑바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표정에서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것 같기도 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조바심도 나는, 어찌 보면 마블 시네매틱 유니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와 영화 <백투더퓨처>에서 타임머신을 만드는 에밋 브라운 박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컵을 쥔 손가락을 보면 전자, 백발에 가까운 색의 장발은 후자를 떠오르게 하며, 독백을 이어간다.
“지금처럼 마구 물을 써버리면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마실 물이 없어질 겁니다. 이번 월요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의 계획을 들어 보시고 함께 논의하시죠.”
장 콕토의 긴 손가락만큼은 못 되고, 손등과 마디에 털도 꽤 나 있지만, 예술가 같은 손가락이 더욱 돋보이는 가운데 한 컵의 물을 들이켠다. 입맛까지 다시고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영상은 끝이 난다. 배경이고 자막이고 없이 한 남자가 독백하고 물 한 잔을 마시는 단순한 이 광고는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생태학자 르네 뒤몽(René Dumont)이 집행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빨간 터틀넥의 사내가 실제 과학자였다.
1904년생인 르네 뒤몽은 농업공학자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갔다가 자연 그 자체를 수탈하는 인간의 행동에 분노하고 우려하면서 생태학자로의 길을 간다. 생산성에 최우선을 두며 과정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말살하는 농업혁명, 기업형 농업에 경고 신호를 보내며 강력한 제재를 호소했다. 누구보다 환경 위기를 일찌감치 설파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기후 위기 따위는 없고, 조작된 것이라 외치는 이들이 많은 현실이니, 1960~70년대에는 어떠했겠는가.
르네 뒤몽에게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미친 행보에 제동을 걸고, '지속가능한 농업'의 메시지를 전하는 무대였다. 그의 뜻에 찬동하는 젊은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벌이는 선거운동이 화제가 되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1.32퍼센트를 득표하면서 6위로 결선투표에는 당연히 오르지 못했다. 특기할 부분은 그 선거에서 르네 뒤몽 바로 다음으로 0.75퍼센트의 득표로 7위를 차지한 인물이 극우파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이었다.
무분별한 세계화와 그에 따른 양극화 심화, 저개발국에서의 인구 문제, 대량생산과 소비의 폐해, 모든 국가에서의 주택 문제 등 전 세계적인 문제들을 의제로 내걸고 토의하는 무대를 마련했다. 프랑스가 환경운동과 정치생태학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른 데는 뒤몽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실제 프랑스 녹색당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대중의 자각을 이끌고 정치 운동으로서 녹색주의가 자리를 잡는 선구자로서 뒤몽을 기린다. '환경 이슈를 정치 무대로 도입하여, 환경 정책을 정치권에서 펼치게 한 사람'이라는 프랑스 녹색당의 정의 그대로이다.
선거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Winner takes all) 싸움이라며, 패자들은 그냥 잊혀버린다고 한다. 1~2퍼센트 정도의 득표율을 올린 후보라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투표율을 떠나서 어쨌든 관심이 쏠리는 행사인 만큼 메시지를 전하는 무대로 선거는 훌륭한 무대를 제공한다. 작년 4월 프랑스에서는 르네 뒤몽이 물 한 컵을 마시는 광고 방영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1974년 대선에서 그의 바로 뒷자리였던 장마리 르펜의 뒤를 이은 딸은 거의 대통령이 될 뻔했다. 그렇게 좋건 나쁘건 1974년 프랑스 대선의 일견 패배자들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르네 뒤몽의 이름을 지금도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뉴욕의 '하이 라인'보다 앞서, 용도를 다한 기찻길을 산책로로 꾸민 '쿨레 베르트' 공원이 파리 12구역에 있다. 2004년에 나온 영화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난 두 주인공이 거닐던 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그 산책로 공원의 정식 명칭이 '쿨레 베르트 르네 뒤몽'이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연상케 한 광고의 주인공이 최고의 멜로 영화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배경으로 남았다. 멋진 반전이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서경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