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Japan] 도장회사의 살아남기

[Trend Japan] 도장회사의 살아남기

  • 양경렬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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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메이지유신 당시 여러 방면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서양에서는 일반적인 사인 문화는 채용하지 않았다. 도장을 찍어야 서류의 품격과 신뢰가 살아난다는 오랜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도장 찍을 일이 많다. 계약서 작성이나 서류 결재뿐 아니라 은행, 관공서에서 사소한 업무를 처리할 때 날인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직장에서는 '도장 예절'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결재란에 도장을 찍을 때 부하 직원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듯 왼쪽으로 비스듬히 찍고 사장만 바로 찍는 우스꽝스러운 관행이다.

직장내 도장 예절: 절 도장, お辞儀ハンコ
직장내 도장 예절: 절 도장, お辞儀ハンコ

코로나가 한창일 때 도장이 의외의 사회적인 변화의 장애요인으로 부각이 되었다. 재택근무나 원격근무가 한창이었는데 도장을 받기 위해 출근을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 것이다. 도장 문화가 재택 근무를 정착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일종의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행정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였다. 2020년 일본 정부는 디지털 시대를 대비해 서면주의, 도장 원칙, 대면 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행정 절차에 대해 인감도장을 모두 폐지 방향으로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업들도 사내 결재나 거래처와의 계약서의 전산화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서면 업무나 직인 업무는 점점 줄이면서 업무 효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도장 날인을 불필요하게 하는 "탈 도장(脱ハンコ)"이 추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장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 전체가 서서히 ‘탈 도장’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도장이 필요한 작업이 점차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수요도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도장 업계가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큰 역풍을 맞고 있는 많은 도장 회사가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용도를 찾아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서예나 일본화, 그림 편지의 낙관 도장, 체험 교실에서 수요를 발굴하거나 편지 봉인을 할 때 사용하는 밀랍에 찍는 "실링 스탬프" 신제품 등 새로운 니즈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직장인의 필수품 ‘시야치하타’

일본에는 신입사원이 첫 출근을 하면 자동으로 지급이 되는 도장이 있다. ‘시야치하타(Shachihata)’라고 불리는 공장에서 규격화되어 자동 생산되는 제품이다. 잉크가 내장이 되어 자동으로 나오게 되어있어서 매번 인주나 스탬프를 찍을 필요가 없는 만년 도장이다. 이름은 들어가지 않고 성만 사용되기 때문에 같은 성이면 구별이 안 된다. 일본에서 성씨는 291,129종류가 있는데, 이중 상위 10위까지의 성씨는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며, 상위 100위까지의 성씨는 33% 이상을 차지한다. 시야치하타가 제작하는 인감에 대응하는 성씨의 수는 약 3,000종이기 때문에 모든 성씨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자동 생산에 포함되지 않는 성은 특별 주문한다. 인감도장은 계약서 등에 사용하지만 시야치하타는 회사의 일상 업무를 하면서 거의 매일 사용한다. 다이소 또는 문구점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시야치하타’ 도장
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시야치하타’ 도장

‘시야치하타’를 제조 판매하는 회사가 아이치현(愛知県) 나고야시(名古屋市)에 본사를 둔 ‘시야치하타’이다. 인장(印章), 스탬프, 문구류를 제조 판매한다. 1925년에 창업이 된 유서 깊은 기업이다. 잉크 패드 없이 찍을 수 있는 도장은 시야치하타가 거의 독점하고 있는 카테고리이고 거의 모든 기업이 사용하였기에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 절차의 디지털화, 기업체의 전산화로 도장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시야치하타만의 새로운 생존 전략이 필요한 시기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상을 바탕으로 한 상품 개발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도장 업계의 경우 오랫동안 남아있는 전통적인 상품을 중시하는 사내 문화가 강해서, 혁신적인 상품 개발에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시야치하타가 이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고, 도전적인 상품을 개발하여 히트 상품을 연달아 출시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소비자 트렌드에 부응하는 유연한 조직 운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시대의 트렌드를 잘 읽어서 이를 반영한 신제품을 개발한 것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비자의 매체 소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스마트폰상에서 X(구 Twitter)나 Instagram과 같은 SNS가 급격하게 보급되면서 소비자의 소비 행동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러한 SNS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그 실정을 제품에 반영하기 위해, 2015년에 조직을 개편한다. 2010년대까지는 많은 매출이 발생하는 소매점과 법인 영업을 중시하여, 영업부와 상품기획 부서가 같은 사업부 내에 존재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게 조직을 개편한다. SNS, 미디어, 광고 그리고 판촉 활동을 담당하는 마케팅 부문과 상품 기획 부문을 합병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상품기획부를 영업부와 분리를 시킨 것이다. 시대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한 조직 운영이 성공한 신제품을 개발할 수 있게 하였다.

조직 개편은 신의 한 수였다. 2019년에 얼룩이 쉽게 지워지는 잉크를 사용해 아이들의 손자국을 남길 수 있는 "PALM COLORS"라는 제품을 출시해, 2019년 3월 출시 후 5년 동안 약 100만 개를 판매하는 성공을 하였다. 더 나아가서 베이비용 손형과 발형을 간단히 제작할 수 있는 "페탓치 베이비용" 키트를 출시한다. 잉크가 아래에 칠해진 필름 위에서 손자국을 찍게 하여 손을 더럽히지 않도록 설계되어서 아이가 잉크가 묻은 손으로 방을 더럽히는 걱정 없이 성장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 과정을 즐기는 새로운 추억 만들기 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애완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강아지나 고양이의 발자국을 남기는 "페탓치 강아지 고양이용”까지 출시한다.

페탓치 베이비용 키트
페탓치 베이비용 키트
페탓치 강아지 고양이용
페탓치 강아지 고양이용

2020년에는 "이로모요(いろもよう, 色模様, 색무늬라는 의미)" 시리즈를 출시하여 또 한 번 히트한다. 이 시리즈는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된 아트용 스탬프 잉크 패드로 총 24가지 색상으로 시작해서 현재는 34가지 색상으로 확대되었다. 일반적으로 스탬프 잉크 패드는 주로 업무에서 사용하는 주황색이나 검은색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제품 개발 당시, 소비자들이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다채로운 스탬프를 찍고 그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하던 트렌드를 반영해서 제품 개발을 하였다. 2024년 1월 말에는 누적 판매량이 100만 개를 넘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이로모요 아트용 스탬프 잉크 패드 시리즈
이로모요 아트용 스탬프 잉크 패드 시리즈

이어서 립스틱처럼 생긴 도장 'LIPIN'을 출시했다. 최근 문구 업계에서 화장품 디자인을 활용한 문구류를 판매하는 것이 유행인데 SNS 등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LIPIN은 립스틱을 꺼내듯 스틱을 돌리면 도장 면이 나오는 구조이다. PALM COLORS, 팻타지 키트, LIPIN 등 신제품의 연속적인 성공 요인은 변화하는 시장의 트렌드를 잘 파악하고 이에 맞춰 시야치하타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기술력을 활용하여 신제품 개발에 반영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립스틱형 도장 LIPIN
립스틱형 도장 LIPIN

틈새를 노리는 해외 시장

해외 사업에도 적극 도전하여 현재 매출의 약 30%를 해외 사업이 차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중국, 인도에 제조 거점을 두고 필기구와 스탬프를 생산하며, 미국, 영국, 중국, 인도의 판매 거점과 함께 각국의 판매 대리점을 통해 약 130개국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해외 시장의 경우는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해당 국가의 문화를 조사하여, 충족되지 않는 니즈를 겨냥해서 고품질의 제품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편지나 일기를 스탬프로 장식하는 사람이 많다. 기존 제품은 단순하게 고무 스탬프와 스탬프 패드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시야치하타는 섬세한 그림과 함께 도장 면에 여러 색의 잉크를 발라 자유로운 색상을 즐길 수 있는 "컬러 팔레트 스탬퍼(Color Palette Stamper)"의 판매를 2023년 9월에 시작했다. 기존 제품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시도이다. 미국 시장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추이를 지쳐볼 필요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인 도장 문화

소비자는 현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의외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제안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니즈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실제로 사용해 보지 않으면 제품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문구의 경우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시야치하타는 틈새시장을 겨냥한 고품질 제품의 개발과 동시에 실제 사용 경험을 늘릴 수 있는 판촉 전략을 통해서 전세계에서 브랜드의 인지도와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행정 절차의 디지털화 등에 의해 역풍을 맞고 있는 도장업계지만 시야치하타는 종래의 도장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색적인 히트 상품을 연속적으로 발매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사양 산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도장이 다양한 용도로 새롭게 활용되고 있다. 일상에 즐거움을 선사하는 즐기는 도장 즉, 엔터테인먼트로의 확대가 가능하다. 또한, 도장은 예술이기도 하다. 인사동에 가면 인주와 같이 수납된 도자기로 된 조그마한 인감 케이스를 접하게 된다. 컬렉션용으로 많이들 구매한다고 한다. 디지털 도장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도장 문화와 현대 기술이 접목되면 새로운 영역에서의 활용 가능성도 있다. 도장 문화의 역사와 현대적 활용 방안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전통을 이어가는 동시에 더 발전된 형태로 발전시킬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로서 도장은 미래에도 우리 삶과 문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시야치하타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면서 앞으로 어떠한 신제품을 세상에 소개할지 기대된다.

 


양경렬 나고야 상과대학(Nagoya University of Commerce and Business)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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