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가 있고, 그다음에 도시가 있었다. 일본의 도시는 철도망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현재 필자의 주된 활동무대가 되어버린 나고야라고 하는 도시도 예외는 아니다. 2024년 현재 나고야시는 인구 약 230만 명으로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에 이어서 일본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다. 해외로부터 나고야로 들어오는 관문이 중부국제공항(Chubu Centrair International Airport)이라고 하면 국내로부터의 관문은 단연 나고야역이다. 1999년에 완성된 JR 나고야역의 역 빌딩 "JR 센트럴 타워즈 (JR Central Towers)"는 54층짜리 초고층 복합 상업 빌딩으로, 백화점, 호텔, 사무실 등이 입주해 있다. 245m의 높이를 자랑하며, 완성 후 몇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역 빌딩"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될 정도로 나고야의 랜드마크로서 인기 있는 명소이다. 나고야역 빌딩의 동쪽 출구(사쿠라도오리구치/桜通口)에서 서쪽 출구(타이코도오리구치/太閤通口)까지의 거리는, 역 내부를 통과하게 되어있는데 약 400~500미터정도로 도보로 5~10분 정도 소요될 정도이다.
나고야역 주변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나고야역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이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역 동쪽은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들어간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는 도시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한편, 역 서쪽에는 가전 양판점, 비즈니스호텔, 이자카야 등이 뒤섞여 있고, 그 바로 뒤편에는 예전의 정취가 느껴지는 상점가(銀座通り商店街)와 평범한 주택가가 펼쳐진다. 이 서쪽 지역에 나고야의 코리아타운이 자리 잡고 있다.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나 오사카 쓰루하시(鶴橋)의 코리아타운만큼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한국 조미료, 식자재를 판매하는 상점, 한국 음식점이 많이 있다. 이곳에는 예전부터 많은 재일 교포가 살고 있었으며, 꽤 이름을 알린 가게들도 있다. 또한 2차 대전 후 최대의 암시장이 존재했던 곳이기도 하다. 외국인이 많이 살았는데 그 이유는, 종전 후 귀국하기 위해 역에 모였지만 귀국선을 받을 수 없어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으며, 이중 재일 한국인이 많았다고 한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맞춰 도쿄와 나고야를 잇는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되면서, 1958년에 나고야역 서쪽 지역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도시 개조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도시 개조 사업의 영향으로 토지가 축소되는 상황 속에서도 이 지역에 남은 재일 한국인들에 의해 코리아타운은 계속 유지되었다. 창업 70년이 넘는 한국 식재료 및 식품점을 비롯해 한국 음식점들이 다수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짙게 간직하고 있다. 2010년경부터 K-POP과 한국 요리의 인기에 영향을 받아, 일반 손님들에게 관광지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는 새로운 문화가 태어나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 코리아타운 언어 경관 공동 연구
이러한 역사가 있는 나고야의 코리아타운에서 동료 교수들과 언어 경관 조사라고 하는 흥미로운 연구를 하였다. 한일 교수 간 공동 연구로 진행되는데 꼼꼼히 분석하고 정리해서 학회지에 발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언어 경관(Linguistic Landscape)에 관한 연구라고 하면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특정 지역이나 공간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어떻게 공공장소에서 시각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거리 표지판, 광고판, 상점 간판, 공공 안내문, 그래피티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연구는 해당 지역의 언어적 다양성, 다언어 사용 실태, 그리고 언어가 가진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1990년대 말부터 도시 간판, 표지판 등을 포함하는 문자 연구를 시작으로 비교적 새로운 분야이지만, 오늘날에는 언어학의 중요한 한 분야로 자리 잡을 만큼 성장했다.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우선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현지 일본인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사용되는 한글은 문자에 들어있는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한국식 식당의 특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식적인 효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간판이나 메뉴에 한글과 일본어가 병기된 예도 있어서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예도 있겠지만 이를 대상으로 하는 고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요리를 제공하는 한국 식당임에도, 한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한류의 영향인지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빙수를 파는 한국식 카페 매장도 보였지만 이곳 역시 아쉽게도 한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어 경관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가능성
결론적으로 이 지역에서의 한글은 "한국"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보 전달은 일본어로 이루어지고, 한국어는 그 상징성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심볼로서의 한글, 디자인으로서의 한글, 미적인 가치로서의 한글이 언어 경관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류 열풍으로 한글에 관한 관심도 많이 증가하였다. 한글로 디자인된 티셔츠, 액세서리는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글을 이용한 예술 작품이나 광고 디자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글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적이고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매체로서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해외에 있는 코리아타운의 언어 경관에서도 한글 디자인에 관한 연구 및 디자인을 활용한 다양한 전개가 필요하다. 나고야 코리아타운의 조사를 통해 이러한 부분이 미흡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가능성도 느꼈다. 이 지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한글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글 자체는 인지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한글 간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한글을 통한 국가 브랜딩에도 연결된다. 간판의 체계적인 한글 디자인, 특히 현지 문화와 언어 환경에 맞는 우리만의 독특하면서 시선을 끌고 좋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한글 디자인의 체계적인 개발 전략이 필요하다.
연구적인 관점에서도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 두 가지 이상의 학문 분야가 서로 협력하여 연구하는 형태를 학제 간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라고 한다. 이러한 연구는 이미 마케팅에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케팅과 행동 경제학, 사회학, 최근에는 데이터 사이언스, AI, 테크놀로지와도 밀접하게 연결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추가해서 마케팅과 언어 경관 사이의 학제 간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 경관과 마케팅을 결합한 연구, 예를 들면 언어 경관과 소비자 행동, 언어 경관과 브랜딩, 언어 경관과 소매 환경 등 언어적 요소가 마케팅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은 학제적 연구로서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겠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해외에 있는 코리아타운의 브랜딩 및 활성화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양경렬 나고야 상과대학(Nagoya University of Commerce and Business)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