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쇠락의 상징이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을 이끄는 도시였었지만, 미국 자동차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욱 먼저 디트로이트의 악명이 높아져 갔다. 도시의 흑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설치한 것과 같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세워졌고, 트럼프가 더욱 높인다고 하는 장벽 비슷한 게 이미 1941년에 건설되었던 분단의 도시였다. 그리고 인종 이슈로 미국 역사에서 1992년의 LA 폭동 이전에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1967년의 디트로이트 폭동이 일어났던 폭동의 도시이기도 하다. 어둡고 거친 그림자가 지배하는 도시였다. 도시의 NBA 농구팀까지도 상대 선수에게 온갖 파울을 하고, 주먹 휘두르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스스로 ‘나쁜 놈들(Bad Boys)’이라 자랑스럽게 칭했다.
자동차로 미국 일주를 하면서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를 향해 가면서, 중간에 있는 디트로이트를 들를 생각도 했다. 빠른 경로보다 살짝 북부로 빠져야 하는 시간 부담도 있었지만, 그 어두운 그림자 지역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있던 차에 1994년 여름에 디트로이트 바로 북쪽에 있는 트로이라는 도시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차를 빌려서 디트로이트 시내로 들어섰다가 황급하게 차를 돌려 빠져나왔다. 뉴욕 맨해튼의 할렘 근처에서 2년 정도 살면서 특정 인종들이 몰려 사는 지역을 가리키는 ‘게토(ghetto)’나 ‘슬럼(slum)’을 꽤 봤다고 생각했으나, 디트로이트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에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대해 알았더라면 치안 불안 따위는 떨쳐버리고 차를 몰고 갔을 것이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예수님을 소재로 하여 펼쳤던 광고를 여기에서도 2020년에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소개했던 적이 있다. (※ 참고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성인(聖人)은 어떻게 생겼나?) 사실 디트로이트 미술관은 역사적 의미나 전시 작품으로 볼 때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이다. 무엇보다 멕시코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유명하다.
벽화는 포드자동차의 창립자인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의 후원으로 1933년에 완성되었다. 처음 이 후원자와 작가가 알려졌을 때부터 의외의 조합이라며 놀란 이들도 많았고, 비아냥도 꽤 나왔다. 디에고 리베라가 골수 공산주의자로 알려졌다. 그런 이가 20세기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포드자동차의 후원을 받고, 그때도 이미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결정판이라는 평가가 있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자동차 공장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에드셀 포드나 리베라 모두 나름의 이야기와 명분이 있었다.
에드셀 포드는 디트로이트라는 도시가 갖는 상징성에 기초하여 이 벽화를 자동차 산업에 바치는 오마주처럼 여겼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리베라에게 작품을 맡긴 것에 대해서는 ‘국가를 초월한 관대한 이해심을 보여줄 기회’라고 했다. 리베라도 ‘기회’라는 낱말을 쓰기는 했지만, 다른 뜻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디트로이트라는 도시에 ‘공산주의적 예술관을 침투시킬 기회’라고 보았다. 그리고 완성 이후에는 이렇게 얘기했다. 자기 합리화처럼 들기도 하고, 공산주의 신념을 가진 예술가로서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 벽화에 보내온 디트로이트 노동자의 압도적 지지는 나의 신조에 대한 지지일 뿐만 아니라, 평생 바라왔던 꿈의 첫 발자국처럼 느껴졌다.”
공산주의자 화가까지 포용하는 관대함을 보인 에드셀 포드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관대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특히 자동차의 실용성에만 가치를 둔 헨리 포드는 디자인에 기반을 둔 예술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의 아들인 에드셀과 자동차 철학이 달랐다. 대놓고 무시하거나 심한 말을 해대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에드셀 포드가 5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 이유라고 한다. 에드셀 포드는 이 기념비적인 벽화가 완성된 10년 후인 1943년에 세상을 떠났다.
벽화 작업을 끝낸 후 리베라의 삶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코끼리와 비둘기의 만남’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스물두 살이나 어린 프리다 칼로와 결혼한 게 벽화 작업에 들어가기 전인 1929년이었다. 원래부터 병이라고 할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했던 리베라는, 1935년 유산 후유증으로 프리다 칼로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에 프리다 칼로의 동생, 곧 처제와 동침하는 패륜을 저지른다. 칼로와 리베라는 이후 헤어지고 재결합하기를 반복하는데, 배신당한 아픔이 칼로의 예술을 활짝 꽃피게 하는 반전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프리다 칼로는 극적인 생애와 작품에 강렬한 인상으로 광고에도 꽤 등장했다. 칼로의 반전 인생과 광고는 다음 편에.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