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문자 그대로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집권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내리며, 루비콘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6천여 명의 부하들에게 내릴 때 한 말이라고 한다. 영어로 이 문장을 보통 “The die is cast”라고 옮긴다. 중학생 때 처음 이 영어 문장을 만나니 두 단어가 원래 아는 뜻을 벗어나 있었다. ‘die’와 ‘cast’였다. 요즘은 주사위를 단복수를 가리지 않고 대개 ‘dice’라고 쓰는데, 이전 영어에서는 ‘die’가 단수 주사위, 복수형은 ‘dice’였다. ‘cast’는 영화나 드라마의 ‘배역’의 의미로만 알았는데, ‘던지다’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인다는 걸 저 문장으로 처음 알았다.
‘cast’에 ‘멀리’나 ‘바깥쪽으로’를 뜻하는 ‘away’를 붙여서 ‘cast away’로 하면 조금 더 강하게, 원래의 영역을 벗어나 멀리 ‘던져 버리다’는 뜻이 된다. 구체적인 상황으로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혹은 공중에서 비행기 사고로 ‘난파’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두 단어를 붙여 쓰면 조난자라는 명사가 된다. 두 단어를 띄어 쓴 제목의 톰 행크스 주연 영화가 2000년 12월에 개봉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척 놀랜드라는 인물은 페덱스(Fedex)에서 일하는데, 업무를 최우선으로 하는, 세계 각지로 바쁘게 출장을 다니며 사는 임원이다. 결혼식도 일에 밀려서 치르지 못해 함께 사는 여자 친구의 애를 태우는데,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려다 말레이시아 사무소의 사고로 바로 출장을 떠나게 된다. 긴급 출장을 위해 탄 페덱스 화물기가 태평양에 추락하면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로 무인도에 표류하여 살게 된다. 4년 만에 구조가 된 그가 한 일 중의 하나로 영화의 마지막은 무인도에 떠밀려 왔던 페덱스에 맡겨진 소포를 배달하고, 그에 이어지는 장면이 장식한다.
기업이 영화를 마케팅에 이용하는 대표적인 방식으로 장면 속에 자신의 상품이나 로고 등을 노출하는 소위 PPL(Product placement)을 얘기한다. 영화 전편을 타고 페덱스의 노출은 차고 넘칠 정도이다. 주인공이 페덱스의 임원이고, 배경이 페덱스 사무실이고,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자세히 설명까지 하는 듯하다. 그런데 페덱스는 촬영 장소를 제공하고, 장치와 비품이나 스토리 구성 등에 협조했고, 금전은 영화사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콘텐츠를 활용한 마케팅 중 매우 특이했던 사례로 이 영화를 소개하곤 했다.
이 영화를 소재로 한 광고가 나와서 또한 화제가 되었다. 미국 소도시의 한적한 주택가에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 시절 톰 행크스를 연상시키는, 어깨 아래로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더부룩한 수염을 기른 인물이 페덱스 로고가 선연하게 보이는 소포 상자를 들고 집을 찾는다. 이윽고 빨간 현관문을 두드리고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자, 페덱스 로고를 보이게 상자를 든 채로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무인도에 고립되어(marooned) 있었어요. 이 소포도 함께 했지요. 그때 이 소포를 꼭 전달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페덱스에서 일하니까요.”
아주머니가 ‘정말 대단해요(admirable)’라고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페덱스 직원이 ‘잠깐만요’라고 하면서 묻는다.
“그런데 소포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죠?”
아주머니가 소포를 뜯어서 하나하나 내용물을 보여주며 대답한다.
“별것들 아니네요. 위성전화기, GPS 위치추적기, 낚싯대에 정수기, 그리고 농작물 종자 같은 변변치 않은 것들이에요. 하하”
모두가 무인도에서 구조되거나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외부에 신호를 보낼 수도 있고, 지구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물고기를 낚을 수도 있고, 식수를 정화하고, 필수 작물을 기를 수도 있었다. 허탈한 표정의 페덱스 직원에게 아주머니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다시 고마워요. 계속 근무 열심히 하세요(Thank you again. Keep up the good work).”
바로 옆에 해결책이 있는데 그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해결책이란 걸 알고도 애써 부러 외면하곤 한다. 마치 자신을 무인도에서 구해줄 용품들을 옆에 두고도 5년이란 세월을 고립되어 보냈던 광고 속 페덱스 직원처럼 말이다. 이번 계엄과 그에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계속 드는 생각이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서경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