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최영호 기자] 한국 광고계는 다른 산업에 비해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이 다소 미흡한 편이다. 산업의 구조와 언어 장벽 등으로 글로벌에서 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글로벌 광고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광고인은 없을까?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광고 무대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광고인은 점점 늘고 있다.
박누리 오길비 아트 디렉터는 세계 광고계의 중심인 뉴욕에서 글로벌 브랜드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학생 때부터 D&AD와 One Show와 같은 국제 광고 공모전에 도전하고 수상했다. 그에게 언어 장벽이나 문화 차이는 오히려 더 새롭고 혁신적인 크리에이티브의 원천일 뿐이다.
여러 위기에 직면한 한국 광고계의 돌파구 중 하나는 "한국"이라는 좁은 곳에서 벗어나 글로벌로 시야를 넓혀야 하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경쟁력을 갖는 것이다. 박누리 아트 디렉터의 경험과 성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국 광고계에 인사이트가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누리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광고 회사 오길비(Ogilvy)에서 글로벌 테크 기업인 IBM을 담당하는 아트 디렉터 박누리입니다. 저희 팀은 전략, 미디어,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IBM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웹 디자인 분야에서 권위 있는 국제 온라인 어워드 중 하나인 THE FWA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누리님께서 광고인이 되신 이유, 또는 광고회사에 입사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부터 창의적인 활동에 큰 흥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크레파스를 들고 벽에 그림을 그리던 순간부터, 학창 시절 친구들의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을 도와주던 경험까지, 항상 무언가를 만들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OgilvyOne에서 기획한 British Airways의 'The Magic of Flying' 옥외광고 캠페인을 보고 예술과 아이디어, 그리고 기술을 접목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제가 찾던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누리님께서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쌓고 계시는데요. 어떻게 외국에서 일을 하게 되셨나요?
저는 미국의 뉴욕에 위치한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광고를 전공했어요. 학생 때부터 D&AD의 New Blood Awards, The One Show의 Young Ones 등 권위 있는 국제 광고 공모전에 꾸준히 도전하며 제 아이디어와 실력이 글로벌 무대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도전들을 통해 얻은 경험과 수상 실적들은 제게 큰 자신감이 되었고, 동시에 더 성장해야 할 부분을 발견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여러 인턴십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고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고, 인턴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졸업 후 정직원으로 채용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뉴욕에서의 여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누리님께서는 준비된 인재였군요. 현지 광고회사에서 일하시기 위해 특별히 무엇을 준비하셨나요?
해외 광고 회사 진출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건 제 개성을 담은 포트폴리오였어요. 문제 해결 능력과 전략적 사고가 돋보이는 프로젝트들을 중심으로 구성하되, 그 안에 저의 시각과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신경 썼습니다. 또한, 광고 작품만이 아니라, 제가 평소 취미로 하던 드로잉과 디자인 작업들도 포함시켰어요. 결국 광고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일이기에, 이러한 개인 작업들이 제 창의성과 열정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일하시는 것의 장단점은 무엇인가요?
해외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건 다양한 문화와 관점을 접하며 크리에이티브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세계 각국에서 왔기 때문에 때로는 언어 장벽이나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러한 도전이 오히려 더 새롭고 혁신적인, 모든 문화의 사람들이 공감하며 소외되지 않는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글로벌 브랜드들과 작업하면서, 하나의 메시지가 다양한 문화권에서 어떻게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지는지를 경험하는 게 정말 값진 배움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 계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지만, 영상 통화로 매일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거리를 좁혀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가족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게 해주었고, 제가 하는 일에 더 큰 책임감과 열정을 갖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광고산업의 변화 속도는 너무 빠릅니다. 누리님께서는 변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일하시고 계시는데요. 지금 뉴욕 광고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요즘 뉴욕 광고계의 주요 관심사는 단연 AI와 인간 창의성의 조화인 것 같습니다. 특히 IBM과 같은 테크의 선두에 위치한 기업과의 작업에서는 단순히 뛰어난 AI 기술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떻게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적인 가치와 감성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리님을 대표하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제가 IBM과 함께 작업한 두 프로젝트를 대표작으로 꼽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IBM의 대규모 글로벌 캠페인이었던 'What If?' 입니다. 이 캠페인은 ‘혁신은 항상 올바른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IBM의 철학을 담고 있으며, 오스카 아이작(Oscar Isaac)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총 4편의 광고 영상과 생성형 AI를 사용한 프린트 광고들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What If?'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된 'The Masters Remastered' 프로젝트는 골프 팬들의 오랜 갈증을 해소한 혁신적인 작품이었습니다. 'What if you could remaster the Masters fan experience?'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흥미로운 통찰에서 출발했는데, 세계 4대 메이저 골프 대회 중 하나인 마스터스 골프 토너먼트에서는 매년 100명의 선수들이 21,600개가 넘는 샷을 기록하지만, 중계진이 실제로 해설하는 샷은 고작 2%인 405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IBM의 AI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초로 모든 골프 샷에 대한 전문가급 해설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개발했고, 마스터스 앱 사용자들이 어떤 선수의 어떤 홀의 어떤 샷이든 전문가의 음성 해설을 들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광고제 중 하나인 칸 국제광고제에서 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으며, 스포츠 중계의 미래를 바꿀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받으며 ESPN, Forbes, Wired 등 유수의 매체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대표작은 최근 IBM과 어도비의 파트너십을 소개하기 위해 진행한 'Fishy AI' 프로젝트입니다. 기업들이 AI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흐름 속에서 IBM이 어떻게 기업들의 AI 콘텐츠 제작을 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도비의 생성형 AI 모델 중 하나인 파이어플라이를 활용하여 12주 동안 250개가 넘는 금붕어 이미지를 만들었고, 각각의 금붕어가 AI의 특정 오류나 한계를 표현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큰 LED 스크린인 스피어에서 진행된 전시에서는 거대한 구형 디스플레이를 어항으로 변신시켜 AI 금붕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관객들이 직접 어항을 핸드폰에 담아 상호작용하며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캠페인은 큰 성과를 거뒀고, 무엇보다 IBM의 AI 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15% 이상 상승했다는 게 가장 의미 있었습니다. 복잡한 기술 이야기를 재미있고 친근하게 전달하면서도 브랜드의 신뢰성과 전문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프로젝트였습니다.
캠페인을 기획 또는 제작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캠페인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공감’이에요.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나 아름다운 비주얼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케팅에서는 결국 의사 결정을 하는 건 사람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둡니다. 복잡한 기술적 내용도 결국 인간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전달될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게 제 신념입니다.
아이디어 발상을 위한 누리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SNS나 뉴스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을 관찰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인사이트를 수집하고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을 즐기는데, 특히 복잡한 기술을 설명할 때는 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시각적인 은유로 바꾸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한 IBM과 어도비의 파트너십을 소개한 'Fishy AI' 작품도 이런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AI가 만드는 수많은 결과물 중에서 정확한 것들만을 골라내는 IBM만의 과정을 어떻게 하면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느 날 팀과 함께 뉴욕의 한 카페에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 옆에 놓인 수조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고기들이 무작위로 헤엄치다가 먹이가 들어가자 마치 어떤 알고리즘에 이끌리듯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며 다채롭게 모여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문득 이것이 AI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결과물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일상적인 것들과 연결 지어 생각함으로써,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창의적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누리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캠페인, 또는 오늘의 누리님을 있게 한 캠페인은 무엇은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캠페인 중 하나는 Always의 ‘#LikeAGirl’ 이에요. 'Like a girl' (여자아이처럼) 이라는 표현이 지닌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깨고, 이를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의미로 재정의하는 과정을 보여준 이 캠페인은 단순한 광고를 넘어 사회적 편견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한 편의 영상이 어떻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사회적 대화를 이끌어내며, 궁극적으로는 실질적인 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완벽한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이 캠페인을 보며 광고가 가진 힘을 깊이 느꼈고 저 역시 언젠가는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리님처럼 해외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예비 광고인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조언해주세요.
해외 광고계 진출을 꿈꾸시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여주지 않은 것,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광고 업계가 거대하고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매일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걸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광고업계의 경쟁은 매우 치열합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메타버스부터 AI까지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고, 전통적인 미디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혁신적인 캠페인을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재능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기에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간다면, 예상치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기회는 찾아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여정을 즐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을 더 재미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거니까요.
앞으로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매일 아침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내는 것,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캠페인이 세상에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래를 위한 준비도 중요하지만, 현재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특히 AI가 광고 산업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는 지금, 이 기술을 어떻게 하면 더 인간적이고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 세계의 크리에이티브들과 함께 일하는 한국인 아트 디렉터로서 제가 가진 문화적 배경과 시각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전을 통해 제가 만든 작업들이 단순한 광고를 넘어서서, 누군가의 삶에 영감이 되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