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시인 두목의 반전과 관덕정 벽화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시인 두목의 반전과 관덕정 벽화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12.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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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관덕정에 가야 해.”

11월 말이 되면서 처가 제주도에 다녀오자고 불쑥 말을 꺼냈다. 새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한 내가 학기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나보다는 처가 몸과 머리 양쪽에 쌓인 피로를 풀고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 문학, 그중에서도 한시(漢詩)를 공부한 처는 <당시삼백수>나 <이청조사선>같은 번역서와 다수의 논문을 냈지만, 에세이류의 책을 올해 11월에 처음으로 출간했다. 지난 몇 년간 처가 한시 읽기 모임을 이끌고, 다양한 형식의 한시 교육도 하면서 기본 자료는 챙겨두고 있었지만, 대중 독자들을 겨냥한 에세이 책은 처음이라 원고를 거의 다시 쓰며 정리하는 거 자체가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 다행스럽게 한 달 만에 3쇄가 들어가게 되면서 마음이 좀 놓였는지 바닷바람을 쐬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겨우 12월 말이 가까워서야 나를 핑계 삼아 실행에 옮겼다. 제주도 여행을 확정하자 가장 먼저 갈 곳으로 처가 관덕정을 뽑았다.

시절한수
시절한수

조선 세종 때 건축되었다는 관덕정은 병사들이 무예를 훈련하는 곳이었다. 제주목 관아와 붙어 있고, 바로 앞에 너른 마당이 있어서 도민들의 집회, 풍물시장 등으로 활용되었고, 역사적 사건의 뒤에 의례처럼 붙은 집단 처형이 벌어진 피비린내 진동했던 현장이기도 했다. 그 관덕정 건물의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창방’ 혹은 ‘들보’라고 하는 부분에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皓)'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홍문연(鴻門宴)'의 7개 그림이 있다. 그 중의 한 그림을 처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즉 ‘취하여 양주를 지나가면 수레에 귤이 가득 찬다’라는 뜻의 글귀가 적혀 있고 수레를 탄 남자에게 여인들이 귤을 던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남자가 바로 두목이다. 두목은 인물과 풍채가 아주 빼어나 양주의 기생들이 그에게 귤을 던지며 구애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요즘으로 치면 슈퍼스타 아이돌쯤 되려나. <시절한시>(이지운 지음, 유노라이프 펴냄, 2024) 161~162쪽

'관덕정 창방(들보)의 그림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시절한시" 저자(필자 촬영)
'관덕정 창방(들보)의 그림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시절한시" 저자(필자 촬영)
'관덕정 창방(들보)의 그림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시절한시" 저자(필자 촬영)

처의 이야기를 들으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인 두목(杜牧)이 양주자사를 지냈는데, 원래 금수저 출신에 외모와 재주까지 뒷받침되어 인기가 하늘을 찔러, 취해서 가마를 타고 가면 여인들이 눈길을 끌려고 귤을 던져 저런 고사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처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 그림에 대해 알려지거나 기록된 것들이 있다.

아주 사소한 사실 하나는 실제 그림을 보면 마지막 글자가 ‘軒’(헌)이 아니라 ‘車’(거)로 되어 있다. 둘 다 ‘수레’라는 뜻이기는 하니, 오타 정도로 봐줄 수도 있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이 도령이 방자와 함께 구경을 나가는데, “’취과양주귤만거’의 두목지 풍채로구나”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두목지’는 ‘목지’가 두목의 호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여인들이 귤을 던지며 열광하고 있는 주인공을 당나라 시절의 다른 두(杜)씨 시인인 두보(杜甫)라고 쓴 기록들이 꽤 많이 보인다. 언뜻 인터넷으로 검색만 해서 보면 두보라고 한 기록물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심지어 ‘실수인가, 착각인가’라는 제목의 브런치에 실린 글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도 두보가 주인공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올해 6월 24일 KBS제주의 프로그램에서도 ‘술을 마시고 가마를 타고 가는 당나라의 인기 시인 두보의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출처 브런치 "실수인가, 착각인가"
출처 브런치 "실수인가, 착각인가"

제민일보 2009년 “대들보에 그린 제주 최초 벽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그런 오류가 ‘1973년 만농 홍정표 선생과 1995년 김봉옥 선생이 쓴 두 보고서에 두보의 일화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제주 편):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2012)에서 두보의 시를 소재로 했다고 소개한 게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그만큼 영향력이 엄청난 작가이자 학자가 그랬으니 그대로 받아쓰고, 그게 인터넷 등지로 많이 퍼지다 보니 정설처럼 된다.

물론 위에서 얘기한 브런치 글이나 제민일보 기사처럼 제대로 사실을 짚은 글들도 있었다. 이런 오류에 곧잘 흥분하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처가 관덕정에서 문제의 그림을 확인하고 사진만 찍고 조용히 다른 자리로 발길을 옮겼다.

시인 두목의 인생에는 큰 반전이 있다. 시인이 스스로 쓴 묘지명에서 자신에게 화려한 명성을 안겨준 시문은 언급하지도 않고, 병서(兵書)에 주석을 단 것만 성과로 뽑았단다. 필설로 이룬 세속 명성에 초월한 모습을 보였다. <시절한시>의 저자도 그런 초탈함의 반전을 실현하는 것일까.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서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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