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잊혀 가는 말 가운데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있다. 동북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의 사회구조를 대변하는 표현이었다. 한문 글자에 분명히 나타나듯이 선비, 농사, 공업 그다음 최하가 상인과 장사였다. 말하자면 장사를 깔보았다.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도 우리 머리에서 이 의식이 사라졌다고 하기에는 시기상조이다. 왜? 이 표현은 전통문화 일부이며 문화란 변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동북아 3개국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서구 세력이 동쪽의 3개국에 개방을 강요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이다. 1840년의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1954년 미국 극동함대 압력에 의한 일본의 개항, 일본의 강요로 1876년 한국의 개항이 이어졌다. 개항은 현대적인 상업과 덩달아 따라온 신문 잡지 그리고 서구식 광고를 이 3개국이 도입하게 되었다.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동북아 3개국이 모두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그런데 광고를 놓고 보면 이 3개국 중 일본이 가장 앞서서 서구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원래 한문이지만, 중국과 한국에는 없었으며 사용하지 않았던 말, 「광고(廣告)」를 19세기에 만들어 이 3개국에 퍼뜨렸다. 그 결과 지금은 이 세 나라가 모두 광고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고 홍콩,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 등 한문을 사용하는 지역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여러 광고매체 가운데 하나가 옥외광고이다. 옥외광고라는 말을 3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먼저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2016년에 한국에는 처음으로 중앙정부가 제정한 옥외광고법(정식 호칭은 아니다)이 제정되었다.

그러면 19세기 중반 개항 이전 동양 3개국에는 옥외광고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옥외광고라는 말은 없었지만, 옥외광고라 할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3개국 공통으로 오래되고 많은 것이 궁전과 사찰에 있는 현판(懸板)이다. 수도 서울에서 가장 교통이 번잡한 시청 앞 덕수궁 정문에 걸려 있는 「대한문(大漢門)」이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한문이 상품 판매를 위한 가판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견지에서는 옥외광고물인 것은 사실이다. 현판은 궁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9개의 서원(書院)에도 많은 현판이 있다. 불교 사찰에도 수많은 현판이 있다.

더 나아가서는 명승지에도 현판이 즐비하다. 안동에는 영호루(映湖樓)가 있다. 여러 차례 홍수를 겪으면서 영호루라는 현판은 떠내려가기도 했지만 어디서든 상서로운 기운이 비쳐 이 현판은 다시 나타났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안동에서는 이 현판은 고려 시대 공민왕의 필적으로 영험함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안동에서는 매년 헌다례식(獻茶禮式)이 거행되고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사찰의 현판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신대현 연구원이 써서 2002년에 출판한 『한국의 사찰 현판 I』이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현판 30여 개에 대한 한글 번역과 해설을 수록했다. 그 뒤 같은 제목으로 II 권과 III 권을 출판했다. 대수로이 여기지 않던 현판의 중요성과 역사적인 가치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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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문화에 대한 견해가 달라진 결정적인 계기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세계 문화 다양성에 대한 선언문을 채택한 2001년 11월 2일 이른바 멕시코 선언이었다. 한국의 문화유산이 등재된 것도 이 선언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국의 광고산업이 해야 할 일은 많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궁궐, 사찰, 서원 및 기타 각종 문화재의 현판 즉 옥외광고 자료를 샅샅이 찾아내서 한국의 통합된 문화로 엮어서 널리 세계로 퍼뜨리는 일일 것이다. 광고뿐 아니라 홍보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커뮤니케이션일 것이다. 세계 광고의 역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은 2,000여 년 전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다. 근래 발굴이 재개되면서 찾은 것이 있는데 지금은 세계적 음식이 된 피자이다. 아직 토마토가 없다는 해설이 들어 있는 그림이 나와 있는데 토마토가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라는 말이 곁들어 있다.
구슬도 엮어야 보배가 되며 제가 낳은 자식도 울어야 젖 준다는 속담이 있다. 부지런히 우리 것 찾아서 또 다른 K-컬처의 나발을 불어야 할 때가 왔다. 공익광고가 시작된 곳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미국이었다. 광고계가 전쟁 승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 뒤 공익광고는 세계로 퍼져 나갔다. 물론 옥외광고도 한몫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