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아마도 해방 후 덴츠와 한국 광고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8.15 광복에서 9월 초 미군의 서울 진주와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있은 항복 문서 서명식을 간단히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해 7월 26일 베를린 교외인 포츠담에서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는데,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통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히로시마 (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탄이 투하된 뒤에야 일본이 이 선언을 수락했다.
한국 광고와 덴츠
아마도 한국의 개항 이후 광고 발전을 이야기하자면 일본의 덴츠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근, 현대 광고와 언론 발전에서 큰 영향을 미친 요시다 히데오(Yosghida Hideo 吉田秀雄)를 들게 될 것이다.
그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사원들과 함께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수락 방송을 듣고 난 요시다 상무는 방송이 끝나자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쓸고 난 뒤 이제 다시 일할 때가 왔다고 사원들을 격려했다는 말이 있다.
요시다는 1947년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덴츠 4대 사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 민방 도입과 PR, 그리고 광고산업과 언론의 현대화와 국제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아마도 일본 패망 6개월 만인 1946년 2월에 그가 발표한 <회사의 당면 과제> 6가지는 덴츠 뿐만이 아니라 일본 언론을 포함한 광고산업이 앞으로 나갈 도전과 희망을 제시한 장기계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회사의 당면 과제
- 상업방송의 실시 촉진과 거기에 필요한 각종 기획과 준비
- 광고 선전의 구상, 기획을 확대할 Public Relations(PR)의 도입과 그 보급
- 광고 합리화에 필요한 조사부 기능 확충, 특히 시장 조사 실행
- 광고 표현 기술의 향상을 위해서 선전 기술부, 상업사진부 창설
- 사업국의 활동 확대를 위해 옥외광고, 기타 매체의 다각화를 조성
- 방계 인쇄회사 창립
민방 라디오와 TV 출현
일본에서 민방 라디오 문제가 대두한 것은 1947년 10월 연합군총사령부(영문 약칭-GHQ)의 정책이 발표된 이후 11월이었다. 민방 정책이 발표되자 8개사이던 출원이 72개사로 폭증했고 그 가운데 15개 신문사도 있었다. 요시다는 그가 미리부터 연구한 미국의 사례를 들어 일본의 총광고비와 1개 라디오 방송국 당 1년 운영비를 참의원 전기통상위원회 공청회에서 발표했다. 그 당시에 민방의 재원인 광고비에 기초해 민방 라디오 방송국의 경영 문제를 제기한 것은 요시다뿐이었고 이것이 일본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장은 1 지역에 1 방송국 원칙이었다. 한편 요시다는 관동지역에서는 <동경방송>을 구상하고 상공회의소 내에 있던 준비 사무국을 덴츠 사무실로 옮길 만큼 민방에 열중했다. 물론 덴츠가 방송국을 경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민주화와 민방 라디오의 역할 그리고 민방이 창출할 광고를 내다보고 있었다.
초기 라디오 광고방송은 시청자의 반발을 우려해 스폰서 이름이나 브랜드명이 나오지 않았다. 광고란 없는 공영방송 NHK에 익숙한 일본사람들은 라디오 방송에 상품 판매 광고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일본 최초의 민방 라디오 방송인 <중부일본방송국>의 첫 방송은 1951년 9월 1일 오전 6시 30분에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 날 일본 최초의 라디오 CM 송은 고니시로꾸(小西六) 사진공업의 광고였다. 그런데 이 일본 최초의 광고노래는 사명이나 사쿠라 필름이라는 브랜드명이 나오지 않았다. 광고가 없는 공영방송에 익숙해 온 때문에 방송에 상품 광고가 나오는 것이 생소해서 저항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민방 초기에 상품광고가 나오자 ‘여보, 그 장사꾼 쫓아 버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다. 일본에서 처음 방송된 이 CM 송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아마추어 카메라 맨.
멋진 카메라 둘러 메고
귀여운 아가씨 햇볕에 세우고...‘
경쾌한 멜로디가 멋진 가사와 함께 흘러 나오자 광고인 줄도 모르고 즐겁게 따라 부르는 노래가 되어 크게 유행했다. 민방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기까지는 꽤 논쟁이 있었고 광고 노래가 자리 잡기까지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한국에는 민방 라디오와 TV 첫광고에 관한 기록이 없다.)
민방 개시 2년 뒤에 등장한 TV는 라디오 방송의 경험도 있어서 순조롭게 시작했다. 한국과는 달리 상업을 덜 깔보는 일본은 큰 말썽 없이 신문과 방송 겸영이 아예 시초부터 자리잡았다.
한국의 방송에 일본의 민방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민방 시대가 본격화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접어든 뒤였다.
PR 시대 대두
GHQ가 일본 민주화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 가운데 하나는 PR이었다. 요시다의 당면 과제 두 번째는 PR이었다. 1933년 덴츠가 만주 수도 신경(新京. 현재 長春)과 대련에서 주최한 일본신문협회대회에 미츠나가 호시로(光永星郞) 덴츠 사장이 참석했고 요시다가 그를 수행한 사건이 그가 PR을 제창하게 된 데는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만주 사정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만주에는 이미 민방 라디오가 있었고 방송국은 초기 적자를 탈피하고 흑자 경영이었다. 요시다는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얻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滿鐵)가 운영하는 방대한 홍보 조직을 자세히 목격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만주국에는 방대한 정부 PR 조직이 있었고 덴츠는 그 조직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한 때는 만철의 홍보조직이 일본 정부(본토)보다 규모가 크게 활동하고 있었다. 요시다의 이 여행이 미친 영향은 2차대전 종료 후 덴츠 PR 조직에 수많은 만주 출신이 참여하는 이유가 되었다. 덴츠는 PR의 보급을 PR하는 선도자가 되었다.
GHQ가 얼마나 일본의 민주화를 위한 PR에 관심을 두었는가는 1949년 7월에서 10월 기간 매주 화요일에 주최한 장장 13회의 <PR 강습회>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PR을 광보(廣報)라 부른다. 1920년대 초에는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육군에서 신문보도를 홍보라고 불렀다. 남만주철도회사와 만주국 PR 조직의 이름도 ‘홍보처‘로 불렀다. 그런데 해방 이후 연합군사령부 (GHQ)가 일본 지자체에 PR 부서 설치를 건의할 때에도 처음에는 PR을 홍보라고 부르자는 안이 나왔으나 만주국에서 홍보 활동이 선전선동에 가까워서 나쁜 이미지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광보로 했다.
이 책은 “초기 광보 바이블(Bible)의 하나가 되었고 일본 광고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일본의 광보 PR 100년』. 96쪽). 무더운 날씨에 당시로써는 드문 냉방에서 휴식시간에는 콜라를 제공했다
PR 강습회
- 주최: GHQ Civil Information & Education Section (민간정보교육국)
- 일시: 1949년 7월 - 10월 매주 화요일
- 회수: 13회
- 강사 (발표자): 27명. 미국인 22명. 일본인 5명; 사회 13명: 일본인 11명, 미국인 2명
- 장소: NHK 동경방송회관
- 발표회 주제: <광보(廣報.PR)의 원리와 실제>. 제1회 발표자: CIE 정보과 돈 브라운 과장 <정부 광보부 존재의 의의>
- 참석자: 정부 기관 및 자치체 광보 담당자. 주요 관련 단체 및 광고회사 등 민간 포함
- 기타 사항: 발표 내용을 『광보의 원리와 실제』라는 제목으로 덴츠가 번역 출판했다.
일본의 PR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거의 없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현대적인 PR은 두 나라 모두 광복 이후 미국에 의해 전달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일본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연합군총사령부(GHQ) 산하의 정보 교육국을 통해 정부/민간 혼합 차원에서 PR이 전달되었다. 즉 관(官)을 대상으로 한 행사를 덴츠와 같은 민(民)이 맡아서 상업화했고 기업으로 키웠다.
한국의 PR 한국도 군정 기간인 1946년 4월 18일 군정법령 71호로 지방도 내무과에 공보담당을 두라는 지시가 있었다. PR이라는 말이 아니고 공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8.15 해방 후 한국 독립과 남북 분단으로 혼란한 정치상항에서 미 군정은 1947년 5월에 민간공보처(Office of Civil Information. 이하 OCI)을 설립해서 견실한 홍보/공보 정책을 시행했다. OCI 활동 기록은 2002년 10월에 기밀 해제된 자료에 남아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OCI는 큰 PR회사였다. 직원 113명 가운데 76명은 한국인이었다. OCI의 활동 대상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떻든 한국이 PR 산업 발전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이 미군정의 OCI 조직을 본떠 PR을 민간 기업화하지 못한 일이다. 일본은 앞에서 언급한 <PR 강습회> 발표 자료를 덴츠가 책으로 만들어 활용했다. 이 책은 당시 일본 PR산업의 성서(聖書)의 하나였다는 기록이 있다.
광고의 합리화: 신문 발행부수 조사, ABC 제도
요시다의 당면과제 세 번째인 광고의 합리화는 1951년 신문용지의 통제 해제와 관련된다. 신문용지 시장이 자유화되어 증면과 판매경쟁이 가열화되고 신문광고시장이 혼란스러워지자 요시다는 신문 발행 부수 공개를 주장했다. 신문 광고료란 부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발행 부수를 밝히는 제도 즉 미국에서 1914년이 시작한 ABC(Audit Bureau of Circulations)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1952년 일본ABC 간담회의 발족이 되었고 뒤에 여러 신문이 부수를 공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대의 광고회사인 덴츠 외에 2위인 하쿠호도(博報堂)도 ABC제도에 적극 찬성했다. 광고주가 찬성하고 일본 제1, 2위 광고회사의 타당한 요구와 영향력을 언론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신문이 ABC 부수 조사에 참여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렀다.
한국에 미친 영향 88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7년 이른바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으로 한국은 사상 최초로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정부 허가제나 다름 없던 신문 발행의 수, 발행 면수, 보도 내용 등의 제약이 풀리자 표현의 자유는 신문의 발행 부수 공개 책임이 대두했다. 올림픽 주최국이라는 체면에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도 찬동하는 ABC 공사제도가 시작되었다.
989년에는 드디어 한국에서 ABC 협회가 창립된 뒤 우리 정부는 물론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일본 ABC협회였다. 필자는 한국 ABC협회 초대 전무이사로서 창립 초기 우리가 미국과 일본의 제도를 연구했다. 두 나라 제도에서 우리 형편에 알맞는 제도를 도입하는데 일본 ABC협회의 큰 도움이 있었다. 특히 부수 공사의 베타랑인 일본 ABC협회 사무국장의 실무 교육은 더없이 귀중한 교육이며 훈련이었다. 미국 ABC협회 전직 전무이사도 사원교육을 도와 었다.
광고의 합리화: 체감광고료
신문광고료 합리화는 한발 더 나아가 체감광고료(遞減廣告料) 제도 도입으로 나타났다. 상거래상으로 보면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제도인데 신문잡지사가 시행을 꺼리는 제도이다. 즉 많이 살수록 단가는 싸진다는 원칙이다. 신문이 싫어하는 광고료 체감제도는 그 뒤 일본 신문이 모두 수용하게 되었다. 이런 제도 정착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의 방송 요금 구조였다. 민방 제도를 도입할 때 미국 방송국은 이미 체감 광고료제도로 되어 있었다. 민방의 도입으로 신문과 방송 매체의 광고 유치 경쟁도 신문의 체감요금제 정착에 자극되었을 것이다.
일본 광고산업의 돌풍: AE제도
50년대 중반 요시다의 미국 광고시장 시찰은 일본 광고산업에 돌풍을 일으켰다. 미국 광고계에는 광고회사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Advertising Agencies. AAAA, 4As)가 이미 1917년에 창립되어 있었다. 광고회사를 파트너로 보고 제품 광고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나누며 경쟁 제품 광고는 금지하는 제도였다. 지금은 상식화된 AE제도는 아직 광고대리점을 스페이스 브로커로 보던 일본 광고계에는 생경했다. 미국 시찰에서 돌아온 요시다는 AE제도야 말로 일본 광고대리점의 앞날이라고 보고 귀국하자 곧 대대적인 AE제도 소개와 도입에 착수했다. 그는 AE제도가 일본의 낙후된 광고대리점 제도, 나아가서는 일본의 광고산업에 혁명을 일으키는 제도로 보았다. 2위인 하쿠호도도 조직 개편을 시작했다.
다만 이 제도 도입은 광고대리점이 혼자서 마음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광고주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매체의 이해도 필요했다. 달리 말하자면 일본의 광고 산업 전체가 달라져야 하는 큰 문제였다. 찬반의 논의가 있기는 했으나, 마케팅 시대의 도래와 함께 AE 제도는 차차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조사의 중요성과 광고 목표 달성에 적합한 크리에이티브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광고대리점의 업무 분야는 AE제도 도입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AE 제도의 도입은 조사업무와 크리에이티브 부문의 조직 확충으로 발전해 나갔고 일본 광고대리점의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시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시각
요시다는 아시아 전체에 눈을 돌렸다. 일본 최대의 식품회사 아지노모도(味の素)의 사장 도멘 토요노부와 함께 지금은 아시아 최대의 격년 광고대회가 된 Asian Advertising Congress (AdAsia)를 1958년에 창설해서 1, 2회를 동경에서 주최했다. 3회부터는 아시아 여러 나라가 순회하며 주최하게 되었다. 한국은 좀 때늦은 1984년 6월에 제14회를 주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그리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까지 6년 동안 일본의 민주화는 일본의 광고산업에 구조적인 혁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변화의 일부는 한국 광고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