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드타임스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피칭은 전쟁이다. 그런데 이상한 전쟁이다. 총성도 없고, 군복도 없는데, 누가 죽었는지는 회의 끝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그게 광고판이다. 이 업계에서 오래 있었지만, 아직도 피칭 날이면 다리가 떨린다. 프리젠테이션 도중 고객의 얼굴이 굳는 순간, 실무자가 메모장을 덮는 순간, 열정은 무너진다.
열정은 10분이면 꺼질 수 있다. 프리젠테이션 도중, 고객의 얼굴이 굳는 순간.브랜드 담당자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오며 “뒤에 회의가 좀 있어서요...”라고 말할 때. 열정은 그 순간 무너진다. 하지만 체력은 남는다. 광고는 결국 체력이다. 그리고 체력은 태도다. 슬라이드 하나 더 만지기 위해 남는 태도, 기획서를 밤새 다시 쥐어짜기 위해 아침 운동을 미루는 태도, 마지막 리허설에 집중하기 위해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태도. 열정은 말로 측정되지만, 체력은 반복으로 입증된다.
들은 이야기지만, 삼성전자의 '갤럭시 Z 시리즈' 론칭 당시, 내부에서는 수차례 슬로건과 콘셉트가 엎어졌다. 체력이 없었으면 죽었다. 하지만 실무자가 아닌, 마지막까지 프레임을 쥐고 있던 단 한 명이 버텼다. 그는 매일 밤 본사 회의실에 남아, 폴더블의 '이유'를 다시 정리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글로벌 메시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체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주란 결국,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의 문제다. 지금은 퍼포먼스 마케팅 전성시대다. 클릭 수, 전환율, 매출기여도— 다 좋다. 하지만 수치와 그래프만 들이미는 순간 광고는 ‘자료’가 된다.
광고는 원래 설득의 예술이다. ‘우리 브랜드가 왜 이 말을 하게 되었는지’ ‘왜 이 메시지가 지금, 이 소비자에게 중요한지’ ‘그걸 왜 우리가 말해야 하는지’ 그걸 설득하는 건, 오직 끝까지 가는 체력뿐이다. 경쟁사 자료가 어떻고, 예산이 어떻고, 실무자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고? 웃기는 소리.
요즘 광고판은 "그래서 이게 왜 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질문이 무서운 이유는 체력이 부족해서다.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다. 피칭은, 이 질문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갈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열정은 꺼진다. 체력은 남는다. 끝까지 밀고 나가라. 승리 법칙은 슬라이드가 아니라, 견뎌온 시간이다. 광고판은 뜨거운 곳이 아니다. 끈적한 곳이다. 결국, 이 판에서 살아남는 건 열정 말고, 체력으로 밀어붙인 사람이다.
하인즈 베커 Heinz Becker
30년 가까이 전 세계 광고회사를 떠돌며 Copy Writer, Creative Director, ECD, CCO로 살았다. 지휘한 캠페인 수백개, 성공한 캠페인 수십개, 쓴 책 3권, 영화가 된 책이 하나 있다. 2024년 자발적 은퇴 후, 브런치와 Medium에 한글과 영어로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Cosmopolitan. Writer. Advertising Creative Director. Created hundreds of advertising campaigns and written three books. One of them was made into a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