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휴가의 조건은 무엇일까? 두툼한 지갑? 번쩍번쩍한 레저카? 풍광 좋은 콘도미니엄? 스피드의 쾌감 짜릿한 스노보드? 하지만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에 빠듯한 도시민들의 짧디 짧은 휴식이라면 얘기가 확 달라진다.
약간의 용기,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여유, 적당한 지점에서 쉼표를 찍는 삶의 리듬감만 있으면 충분하다. 다만 장소가 문제다. 꽉 막힌 현실로부터 벗어나 ‘나’라는 알량한 존재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는 ‘지상의 섬’을 찾아야 한다.
그런 용도에 딱 맞는 ‘숨어 있기 좋은 방’ 하나를 안내할까 한다. 물론 소개료도 필요 없고 거기까지 가는 값비싼 일등석 항공료도 필요 없다. 기상천외한 체험에 푹 빠질 상상력의 쪽문만 활짝 열어젖히면 그걸로 끝이다.
몇 날 몇 밤 너스레를 떨어도 레퍼토리가 떨어지지 않는 무용담, 두고두고 곱씹을수록 맛이 새록새록 나는 추억담, 그런 걸 남기기 위해 떠나는 무전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안성맞춤한 곳이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묘미, 인생의 밑바닥으로 냅다 떨어져 보는 초절정 황당 체험, 정신을 완전히 분해한 다음 다시 재조립하는 익스트림 게임 같은 짜릿함. 왠지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곳이다.
인터넷 여행사이트를 뒤적이다 유난히 눈에 띈 호텔 광고가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점을 두고 세계 도처에 체인을 가지고 있는 한스 브링커(Hans Brinker)라는 버짓호텔(Budget Hotel) 이다. 그런데 호텔 광고라면 으레 연상되는 격조나 품위, 분위기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뉴욕 페스티벌, 클리오 같은 국제광고제에서 연이어 수상하면서 ‘뜬 광고’이기도 하다.
한스 브링커 버짓호텔 광고 캠페인
사서 고생을 하는 젊은이들의 도발과 삐딱한 호기심, 무언가에 대한 반항 심리, 세상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떠돌고 싶어 하는 집시 행각, 뭐 이런 것들이 한방에 표현된 ‘망나니 같은 광고’라고 해야 될 것 같다. 형편없이 망가지는 걸 짜릿한 쾌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룻밤 묵는 걸로 평생 추억이 되는 신기한 호텔이라는 얘기를 온갖 기발한 화법으로 하고 있다.
![](/news/photo/202502/23129_54289_2352.jpg)
![](/news/photo/202502/23129_54290_2724.jpg)
![](/news/photo/202502/23129_54291_2735.jpg)
그림을 반으로 딱 갈라서 체크인과 체크아웃 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고 사진 두개가 전부인 광고. 들어올 때는 꽤 반듯하게 보였던 젊은이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엉망으로 망가진 모습으로 나간다는 얘기인 듯하다.
머리는 봉두난발로 헝클어져 있고 입가와 목 언저리엔 뭐엔가 꼬집힌 자국이 선연한, 첫눈에도 해괴망측한 광고다. 이 호텔의 광고는 죄다 이렇게 불량기 넘치는 ‘네거티브 톤’이다.
이런 식의 광고도 있다. 흥얼흥얼 술주정뱅이 하나가 카메라에 잡힌다. 카메라 앵글도 덩달아 취한 양 빙글빙글 돈다. 재즈기타 선율이 마구 뒤틀리면서 취기를 더해 준다. 밤새 퍼마시고 방금 쉴 곳을 찾아든 무전여행자 하나. 정신없이 비틀거리면서 싸구려 모텔의 복도를 여기저기 휘젓고 다닌다. 한참을 헤매던 사내는 이윽고 어느 방문 앞에서 머리를 툭 부딪는다. 두어 번 박으니까 안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진다. 결국 이 집의 ‘손님 깨워주기 서비스’는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얘기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 암전된 화면에 자막이 뜨면서 상황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호텔의 모닝콜’.
또 다른 광고 한 편. 화장실에 들어온 남자 하나가 벽에다 낙서를 한다. 그러곤 또 다른 녀석이 들어와서 오줌을 누고 낙서를 하고. 그런 장면이 반복된다. 소피보는 소리만큼이나 낙서하는 모양새도 각양각색. 똥 누는 자세로 엉거주춤 낙서를 하는 친구, 소변기를 끌어안고 심각하게 이름을 새기는 뚱딴지. 급기야는 남정네들 이름 틈바구니에 자기 이름을 얌전하게 새기는 내숭 아가씨까지. 자막이 이런 일련의 행위에 이름을 붙여준다. ‘우리 호텔의 방명록’.
설비와 서비스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반어법으로 간결하고 재치 있게 구사한 광고도 돋보인다. ‘방마다 문이 있다’라거나 ‘개인 룸 키를 지급한다’, ‘마침내 객실에 침대를 들여 놓았다’, ‘배수가 되는 양변기가 있다’, ‘불이 들어오는 전구를 갖춰 놓았다’라는 등등, 호텔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을 대단한 특종 뉴스를 전하듯이 뻔뻔하게 자랑하는 광고들이다. 빈티 줄줄 나고 싸구려 같은 것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키치(kitsch) 감수성을 자극하는 듯하다.
![](/news/photo/202502/23129_54294_3254.jpg)
![](/news/photo/202502/23129_54295_3254.jpg)
![](/news/photo/202502/23129_54296_3255.jpg)
![](/news/photo/202502/23129_54297_3255.jpg)
한스 브링커 광고는 이처럼 의뭉과 엄살, 너스레의 종합 선물세트다. 아예 삐딱하게 나가는 수사학을 카피의 기본 전략으로 써먹고 있다. 이왕 고생하는 거 바닥까지 한번 가보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감행하는 용기가 차고 넘친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떨어진 화장실에 그래도 화장지 꽂이만은 정성스럽게 정돈해두는 풍경, 다 찢어지고 얼룩진 누더기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노출시키면서도 멋진 그림을 머리맡에 붙여 놓고서는 ‘이보다 나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린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카피로 생색을 내는 광고. 최악의 시설 속에서도 최선의 봉사만은 극진히 다하고 있다는 다짐을 애교스럽고 유쾌한 농담에 실어서 천명하고 있다.
![](/news/photo/202502/23129_54298_3357.jpg)
![](/news/photo/202502/23129_54299_343.jpg)
![](/news/photo/202502/23129_54300_355.jpg)
고급 스탠드, 다기 세트, 명화가 걸린 액자, 정원수, 와인 잔, 서랍장 등 일류 호텔 못지않은 화려한 시설 집기를 보여준 뒤 ‘그림은 실제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라고 슬쩍 비켜가는, 미워할 수 없는 변명도 한다.
![](/news/photo/202502/23129_54301_3533.jpeg)
![](/news/photo/202502/23129_54302_3618.jpg)
변두리 목욕탕 같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퀴퀴한 싸구려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그럴수록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런 초 염가 호텔이라면 적어도 번쩍번쩍한 인테리어로 손님들의 기를 죽이진 않을 것 같다. 나이트클럽, 레스토랑, 카지노 같은 사치스런 부대시설로 투숙객의 여행비를 탈탈 털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호텔 요금은 잠자는 데만 쓰이는 최소한의 비용임을 말하듯이 최소한의 광고 제작비로 최고의 크리에이티브를 연출해 내고 있다. 마치 낙서 같고 장난 같은 광고. 타깃의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기만 한다면 이렇게 천진난만한 표현도 충분히 먹혀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설, 격조, 품위 등의 호텔을 둘러싼 고정관념의 족쇄를 보기 좋게 격파하고 있다. 이 나라 네덜란드가 낳은 영웅 히딩크가 축구의 고정관념을 해체했듯이 말이다. 상식을 거스르는 파격은 뒤집어 보면 소신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역시 광고는 어깨에 힘을 뺀 만큼 쌈박한 아이디어가 실린다.
'최악'을 넘어 '기상천외'로
앞에서 소개한 광고들이 나온 지도 벌써 십년이 넘게 지났다. 한스 브링커 버짓 호텔은 광고계의 '트롤'답게 여전히 기상천외하다. 요즘 이 호텔의 메시지는 단순히 ‘최악’임을 강조하는 것을 넘는다. 코로나 시대 이후의 변화된 여행 트렌드와도 절묘하게 맞물린다. 최근 광고는 “기본도 사치다”라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여전히 웃음과 충격을 동시에 안겨준다.
“우리 침대가 불편하다면 암스테르담의 공원 벤치는 어떨까요?”라는 어깃장을 놓는 광고. 침대가 딱딱하고 매트리스가 얇은 점을 돌려쳐서 비꼰다. 도시의 풍광을 야외에서 즐기며 하루를 보내보라는 대담한 제안이다. 물론 농담이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자유롭고 캐주얼한 여행 경험을 너끈하게 담아내는 레토릭이다.
![](/news/photo/202502/23129_54303_374.jpg)
또 다른 포스터에는 호텔 내부의 오래된 계단을 배경으로 보여준다. “엘리베이터? 건강도 생각하셔야죠.”라는 카피가 능청스럽다. 지친 여행객에게 계단 오르기를 친환경적이며 건강에 좋은 활동으로 포장하는 배짱. 한스 브링커 특유의 '뻔뻔함' 그 자체다. 의외로 SNS에서 반응이 폭발했다. 실제 투숙객들이 계단에서 찍은 인증샷이 줄을 이었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는 농담을 덧붙이기도 했다.
![](/news/photo/202502/23129_54304_3830.jpg)
호텔의 리노베이션 소식을 알리는 광고도 재치넘친다. 카피는 “새로 도색된 화장실”. 대리석 세면대, 레인 샤워기 등을 자랑하는 대신, 한스 브링커는 벽에 칠해진 새 페인트와 수세식 변기 하나로 열세를 반전시킨다. “우리 화장실은 이제 회색 벽이 아닌 흰색 벽입니다!”라는 광고 또한 실소를 자아낸다. 커피 잔에 티 스푼 한개를 더 꽂아두곤 '업그레이드'라고 생색내는 광고도 귀엽다.
![](/news/photo/202502/23129_54305_422.jpg)
![](/news/photo/202502/23129_54306_422.jpg)
코로나19 이후, 호텔들의 최우선 정책은 단연 방역과 위생이다. 그런데, 한스 브링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었다. “우리 호텔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기본이지요. 아무도 같은 방을 쓰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라는 카피가 해답이다. 낡은 시설을 오히려 방역 우수 사례로 포장하는 신의 한 수. 농담을 넘어 자원과 비용을 최소화하는 여행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디지털 시대의 반전 매력
한스 브링커의 광고는 디지털 환경에도 강하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여행객들과 소통하며 유쾌한 투숙 후기를 공유한다. 한 고객이 방에서 발견한 오래된 전구를 찍어 올렸다. 클레임에 유머스런 댓글로 응수했다. “저희가 준비한 빈티지 컬렉션을 제대로 즐기셨군요.”
한스 브링커 버짓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다. 여행자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최선의 서비스와 최고의 경험만을 약속하지 않는다. "최악에서 최고의 추억을 만든다"는 모토를 내세운다. 광고뿐 아니라 실제 투숙 경험에서도 살아 숨쉬고 있다.
이현우 전직 카피라이터 / 동의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