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에 워라밸이 있다

환상 속에 워라밸이 있다

  • 송창렬 크랙더넛츠 대표
  • 승인 2025.03.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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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 아니라, 통합을 말할 때다

사진: Tim Gouw / Unsplash
사진: Tim Gouw / Unsplash

1. 워라밸을 외치던 나

나는 커리어 초반부터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을 누구보다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퇴근 후에는 업무 생각은 물론, 문자 메시지도 멈춰야 다음 날 더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퇴근 후에도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업무를 이어가려는 상사에게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건 아닙니다. 일을 하려면 쉴 수 있어야죠."

당시의 나는 그것이 건강한 직장인의 당연한 권리이자, 올바른 조직문화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조직 안에서 부끄러움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주장은 나의 이상주의적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일과 삶을 철저히 분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어느덧 조직의 시니어가 되었고, 이제는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일과 삶은 생각만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에게 깊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퇴근 후엔 일을 잊어야 한다'는 이분법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2. 브라이언 콜린스의 직설 – "워라밸은 Myth"

작년, 런던 D&AD 페스티벌에서 브라이언 콜린스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당시 나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워라밸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그의 회사인 COLLINS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Work-Life Balance? It's a myth."

그는 이어 말했다. "일과 삶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해롭습니다. 더 많은 삶은 더 적은 일을 의미하고, 더 많은 일은 더 적은 삶을 뜻한다는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비논리적이고 미성숙한 접근입니다."

그는 그저 비판에 그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 아니라 통합"이라는 말로 핵심을 짚었다. 일은 삶의 의미 있는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단순하게 구분하고 잘라내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성숙한 방식이라는 말에 나는 깊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도 말했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입밖에 꺼내는 사람은 채용하지 마라. 그건 독이 든 성배(poisoned chalice)와 같다."

1on1 Interview with Brian Collins at 2024 D&AD
1on1 Interview with Brian Collins at 2024 D&AD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덧붙인 한 마디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I've never seen someone who is successful and didn't work their ass off. (성공한 사람치고 죽어라 일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날카롭고 직설적인 그 말은, 역설적이게도 진실이라 더 울림이 컸다.

 


3. 안성재 셰프의 현실 감각 – "지금의 불균형이 미래의 선택지를 만든다"

얼마 전에는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안성재 셰프가 인터뷰 중 던진 한 마디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그는 말했다. "워라밸을 지금 지키면, 미래의 워라밸은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불균형한 삶이 미래의 더 많은 선택지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같았으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의 말에 100% 공감한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진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균형은 피할 수 없고, 오히려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워라밸을 지키면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전문성을 쌓고, 인정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필자는 최근 어느 입시 전문가의 쇼츠에서 본 말이 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은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만 공부하는 시간이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책상에 앉아 있지 않을 때도 해당 과목을 계속 생각하고, 머릿속이 끊임없이 돌아간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진짜 몰입이란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머릿속을 점유하고 있는 '생각의 밀도'에서 비롯된다.

일도 마찬가지다. 그 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되짚고, 연결짓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영역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결국,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워라밸을 지키며 평범한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워라언밸(Work-Life Unbalance) 속에서 몰입하고 흔들리며, 진짜 전문가로 성장할 것인가.

그 선택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4. 최인아 대표의 통찰 – "당신의 일이 곧 당신이다"

최인아 책방의 최인아 대표가 자신의 책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에서 말한 한 구절도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은 회사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맡은 '일'의 주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일이라도 내가 하고 있다면 그건 '내 일'입니다."

일이란 그저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나의 태도와 자세를 통해 '내 것'이 되는 시간이다. 결국 그 책임감과 몰입이 차곡차곡 쌓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나만의 커리어를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결국 내 삶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5. 진짜 워라밸은 '선순환'이다

이제 나는 '균형'이라는 말보다 '통합'이라는 말에 더 끌린다. 일과 삶은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의미를 확장해주는 관계에 가깝다.

'퇴근 후는 삶, 출근 중은 일'이라는 구분은 더 이상 지금 시대의 리듬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건 일이 삶의 일부가 되고, 삶 또한 일을 채워주는 구조, 즉 '통합적 삶'이다.

단순한 Work-Life Balance가 아니라, Work-Life Integration이 필요한 시대. 일이 삶을 견인하고, 삶이 다시 일을 움직이는 선순환의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진짜 워라밸이라 부르고 싶은 삶의 방식이다.

Work powered by life. Life powered by work. 

이제는 균형이 아니라, 그런 통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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