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25명 남짓 되는 주부를 큰 회의실에 초청하여 연신 TV 광고물들을 틀어주며 1990년대 중반의 상당 시간을 보냈다. 모 식품회사가 새로운 식용유 광고를 TV에서 선보이기 전에 마지막 단계로 해당 제품의 목표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반응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조사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그 식품회사에서 TV 광고물을 집행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하는, 소위 ‘disaster check’를 하는 게 큰 목적이었다. 덧붙여 광고물 자체에 대한 평가의 의도도 있었고,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킬지 사전에 감을 잡으며, 경쟁사의 광고물들에 대한 주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자리이기도 했다. 당연히 고칠 점도 찾고 다음 광고의 팁을 얻기도 하는 괜찮은 조사였다. 20여 건의 신규 광고물들에 대한 조사를 직접 진행했는데, 광고와 소비자에 관한 생생한 공부 기회였다.
기억에 생생한 상황을 만들어준 한 광고물은 콩을 한 됫박씩 쌓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우리의 식용유를 만들려면 콩이 무려 여섯 됫박이나 들어간다, 곧 원료가 아주 충실하다는 얘기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 광고물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있다. 하나하나 콩 됫박을 쌓는 모습이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당연히 그때 모인 주부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조사 장소에 들어와 주부들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광고주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주부가 질문을 했다. 그 식품회사를 위한 ‘광고물 사전조사’를 거의 도맡아서 진행했는데, 참석자가 질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의외이면서도 반갑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콩 가격을 생각할 때 그렇게 여섯 됫박이나 써서 식용유 만들 수가 없다’라고 단언했다. 밑지면서 콩 여섯 됫박으로 식용유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공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마침, 그즈음에 해당 광고주인 식품 회사에 다니던 친구에게 콩을 어떤 식으로 몇 가지 제품으로 쓰는지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대로 옮기며 대답했다. '저 콩들을 짜서 식용유를 만들고, 그다음에 다시 남은 기름으로 세제나 비누 원료로 쓰고, 마지막으로는 동물들의 사료로도 쓰면서 몇 차례 재활용을 하므로 가능합니다'라는 요지로 대답을 했다. 몇몇 주부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대답을 잘했다고 혼자 흡족해할 정도로 잘 넘어가는 듯했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질문했던 주부가 다시 손을 들고 더욱 공격적으로 얘기했다. 국정감사에서 몰아치며 공세를 퍼붓는 국회의원 같았다.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도 지금의 콩 가격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저 콩들 중국산이죠? 중국에서 수입한 것들이죠?"
아주머니 참가자들 뒤쪽에 앉아 있던 광고주를 쳐다보니 손으로 X자를 그리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해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를 연신 보냈다. 시간을 벌려고 '혹시 중국산 콩이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되받아 치듯 질문했다. 그러자 두세 명이 '그럼 안 먹지'하고 바로 대답했고,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중국 콩을)어떻게 믿어', '비싸도 국산 원료 쓴 것 먹어야지' 식의 발언을 하며 뒤를 이었다.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아주머니는 그에 더욱 힘을 얻어 재차 '맞죠? 중국산이죠?"하면서 몰아붙이고, 광고주는 더욱 당황하며 제스처가 빨라 지는데 한 주부가 갑자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국산을 쓰겠어?"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그에 맞추어 몇몇 주부가 "그래, 몇 차례 재활용한다지 않아"라면서 호응했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황급하게 "여러분들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답변을 대신하면서 다음 차례로 넘겨버렸다.
나중에 조사 진행을 끝낸 후에 광고주는 잘했다고 칭찬하는데, 질문했던 주부가 내게 와서 다시 물었다.
"저거 중국산 맞죠?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산이야!"
집요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광고주도 있고 해서 "안전하게 만듭니다"라는 빗나간 듯도 하고 제대로 대답한 듯도 한 역시 흐릿한 답변을 던지며 자리를 피했다.
원산지 이미지 얘기를 많이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할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본사의 위치, 디자인, 재료, 제조 공정상의 일부, 노동자 국적 등 여러 가지 요소로 원산지 이미지를 세분하여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중국산 콩을 수입해 싹을 틔워 재배한 콩나물은 중국산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올해 초 나왔다.
중국에서 콩을 어마어마하게 생산하여 수출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중국은 콩의 세계 최대 수입국이다. 작년 2024년 중국의 콩 생산은 2천만 톤 약간 넘는데, 수입은 그 다섯 배인 1억 톤을 넘겼다. 이번 관세전쟁에서 중국의 최대 약점이 콩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거의 돼지 사료로 쓰기 위해 콩을 수입했다. 중국인들의 소득 수준이 오르면서 돼지고기 소비도 늘고, 돼지 사육이 늘었다. 가뜩이나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데, 돼지 분뇨가 그에 일조하고 있다. 결국 중국산 산물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묘한 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서경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