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혼자 영국을 여행 중이던 한국인 신사가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신분과 연락처를 알아봤다. 오래전에 부인과 이혼을 했고, 한국 내에 그의 친척은 없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영국의 은행에 무려 4천5백만US$의 예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인 당신이 우리와 함께 팀을 이뤄 몇 가지 일만 처리하면 이 돈을 찾을 수 있다. 이 돈을 찾아서 반씩 나누어 갖자."
몇 년 전에 생판 모르는 영국인이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그즈음에 역시 생면부지의 영국인으로부터 아주 비슷한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갑작스레 사망한 사람이 한국인 신사가 아닌 여행 중 사고를 당한 부부였다. 부부도 거액의 돈이 영국의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데, 한국인 하나만 끼면 예금 인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종류로 해외에서 느닷없는 돈벌이 기회가 있다며 꾀는 경우를 1990년에 처음 봤다. 당시 전자기기를 생산하여 수출하던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팩스로 수신한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다. 팩스로 수신한 내용은 이러했다.
"나이지리아에서 사업하고 있는 영국인 기업가이다.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이지리아에 얼마 전 쿠데타가 나서 정권이 바뀌었다. 이전 정권의 실력자들이 숨겨둔 돈 수천만 달러가 있다. 이제 눈먼 돈이 되었다. 네가 약간만 도와주면 아주 쉽게 그걸 찾을 수 있다. 찾아서 반으로 나누자."
친구는 '이거 사기지?'라고 연신 물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로또 당첨과 같은 행운이 될지도 모른다는 바람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자기 부서의 선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몰래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혹시라도 팩스를 보낸 이들에게 문의 답신을 보내는 등 어쨌든 소통하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내게 보인다고 했다.
친구의 팩스에서 내가 받은 메일까지 지난 20~30년 시대의 변화가 반영되었다. 소통 채널이 팩스에서 이메일로 바뀌었다. 쿠데타로 실각한 나이지리아 군부 실력자의 비자금이 돈 많은 한국인 여행자의 은행 잔고로 바뀌었다. 1990년에 친구가 받은 팩스를 보고, 이런 농담을 했다.
“한국이 쿠데타도 일어나고, 스위스 은행에 돈도 많이 빼돌리고 하니까, 나이지리아 정세와 상황이 잘 먹힐 것으로 생각했나 봐.”
친구가 받은 것과 같은 내용의 팩스가 꽤 많은 한국 기업에 뿌려졌던 것 같다. 아마 다른 나라에도 팩스 번호가 있는 곳이면 보냈을 것이다. 개인으로 인지, 기업 차원에서 인지 모르겠으나, 몇몇 사람들이 나이지리아 비자금 운운한 이들과 팩스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한국인들을 파리로 오라고 해서, 거기에서 여비와 소지품 등을 뺏고, 심하면 인질로 잡은 후에 송금을 받고 나서 풀어주는 일들이 몇 차례 있었다고 들었다.
이후 한국 경제와 정치 상황이 또한 크게 바뀌었다. 경제가 발전하며, 한국인들은 소득이 늘어나 해외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쿠데타나 계엄과 같은 정치적 비상 상황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환경이 된 것 같았다. 한국 국민도 글로벌 감각을 갖추고 똑똑해졌다. 사기꾼 일당도 시나리오를 바꿔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나이지리아 쿠데타 운운하는 메일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존 바에즈 자서전>(이운경 옮김, 삼천리 펴냄, 2012)을 읽다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Auguries of Innocence(순수의 전조)'란 시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났다.
A Truth that's told with bad intent
Beats all the Lies you can invent
(악의로 말하여진 진리라도
그대가 꾸며낸 모든 거짓을 이긴다)
지금 시대에는 달라졌다며, 이 시구를 시니컬하게 바꾸어 보았다.
A Lie that's told with bad intent
Beats all the Truths you can Show
(악의로 말해진 거짓말 하나가
그대가 제시하는 모든 진실을 이긴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인 고야를 아주 세밀하게 파헤쳐 그린 네 권짜리 전기가 있다. 일본 작가다운 꼼꼼함과 비유가 빛나는 <고야>(홋타 요시에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 2010)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피레네산맥이 아무리 높다 해도 사람의 소문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고야> 2권에서.
소문들은 대개 가짜이기 쉽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소문들이 훨씬 빠르게 더 멀리 퍼져 나간다. 요즘의 디지털 통신의 시대에는 속도나 전파의 확산이 이전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이다. 상처는 더욱 깊고 치명적으로 되었다. 그래서 이제 기업들의 마케팅 명절로 자리 잡은 만우절이 차라리 반갑다. 속이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이 벌이는 잠깐의 반전 놀이로서 만우절 마케팅을 기대한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서경대학교 교수